동기

동기 (2007/9/17)

[원고 발췌 9]

철길 따라 알 수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질문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가?’ N은 자신이 어쩌다가 이 일에 투신하게 됐는지 새삼 따져보고 싶어졌다. 어쩌다가, 왜 이 학교사업이란 것을 맡게 됐지? 나는 진정 왜 이 일을 하고자 하는 걸까? 활동적인 평소의 일상에서는 별로 자문하지 않는 것들을 새삼 따져보기 시작했다. 워낙 골치 아프게 매사를 따지는 것을 싫어하는 타입이었는데, 자신의 그런 성향이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달라진 것도 같았다. 아무튼 자신의 삶에 대해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이유는 표면적인 것이다. 진성의 김회장이라는 재력가가 보장해주는 현실적인 이점이 그것이다. 몇 해쯤 열심히 준비하고 고생 좀 해서 학교를 세우고 나면, 젊은 나이에 학원 이사장으로 등극하여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부럽지 않은 처지가 될 것이라는 점, 그 매혹은 N에게 대단히 강력했다. 단순히 한 학교재단의 이사장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공부도, 연구도 더 해서 보다 큰 규모의 학원 사업까지 꿈꿔볼 수 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준비 과정에만도 기업의 인력과 조직이 조력해주고 있으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갈 만 한 보수도 매달 지급받고 있다. 이번 여행에도 ‘출장비’가 넉넉히 지급됐다. 여전히 비좁은 연립주택에 기거하고 계시지만, N의 수입 덕분에 어머니도 많이 안정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돈과 지위가 자신이 이 일에 투신하게 된 동기의 전부인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N은 애시당초 지적인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다. 물질에 대한 소유욕보다도 지식과 학식에 대한 소유욕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물욕이나 지식욕이나, 둘 다 뭔가를 움켜쥐고 싶다는 소유 욕구임에는 다름이 없겠다. 헌데 물질 욕구가 물신숭배라는 단순한 행동 양태로 표출되는 데 비해, 그래서 이른바 ‘명품’ 기호 등으로 소박하게 표현되는 데 비해, 지식/학식 욕구는 보다 복잡한 양태로 드러나는 법이어서, 근원의 소유욕 자체를 은닉하기 위해 표면적으로 고상해 보이는 이상주의의 겉옷을 걸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먹물’은 위선적이라고 보는 대중의 견해가 대개 정확한 것이리라.

N은 자신의 지적 허영 그 자체는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허영의 기저가 천박한 소유욕에 불과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다. 자신의 지적 욕구를 순수한 ‘정신적’ 차원의 갈망쯤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 ‘물질적’ 돈이나 ‘육체적’ 쎅스에 반하여. 따라서 이번에 학교사업에 투신하게 된 것도 사회경제적 이득이라는 동기 이외에, 이상주의적이고 도덕적인 자아의 동기가 관련돼 있으리라는 추측이 일어났다. 평소에 스스로를 이상주의적 드리머 기질이 있는 인간이라 간주해온 N으로서는, 자신이 교육 사업에 투신하게 된 것이 그런 기질의 자연스러운 표출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래, 현실적 성취에 대한 내 욕심과 이상주의에 대한 내 동경을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을 일로 이 학교사업 만 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어?’

이렇게 생각하니 스스로 정리가 잘 되는 것 같았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손잡음, 꿈을 좇으면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그야말로 지순한 예술을 추구하면서도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즐기다 간 지극히 드문 경우 중의 하나인 독일 작곡가 멘델스존과 같은 행운을 자신도 이번 생에서 누리게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차창 밖을 보니 푸른 강물 저 너머의 활엽수 한 그루는 이미 누르스름하게 변색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석 달쯤 전에 자신의 정신 깊숙한 곳을 찔렀던 물음인 ‘원래 하기로 돼있던 일’의 바로 그 ‘일’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형모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해오고 있는 작금의 공부에 N은 전에 없던 열의를 쏟아 붓고 있고, 이는 지난 학기까지만 해도 학점이나 챙기며 다니던 대학원 과정과는 딴판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자신의 ‘소명’임이 입증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언제나 그래왔어. 머리도 그다지 나쁘지 않고 아주 게으른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일 한 가지에 진정으로 몰입했던 적은 없었잖아. 한 번도 꼭 하고만 싶었던 그런 일거리를 발견했던 적은 없었어. 명문대를 졸업하고,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도 다 자존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내가 나를 바쳐서 공부를 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야. 그래서 지난 봄에만 해도 내가 점점 무력감에 빠져들고 있었던 거야.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고. 그런데, 그랬던 과거의 나에 비해보면 지금의 나는 훨씬 열중해서 재미를 느끼며 이 공부를 하고 있잖아.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학점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도 스스로 열심히 집중해서 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학교를 운영하는 일이야 말로 정말로 나에게 맞는 바로 그 일일까? 나의 천직, 소명일까?’

전에 없이 몰입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는 긍정적인 싸인이다. 또 그 일이 현실적인 생활까지 보장해줄 것이라는 데에야. 그런데 바로 이러한 현실과 명분과의 정합성이 이 일에 대한 N의 의문을 중단시켰다. N은 뭔가 더 자문해볼 거리가 남아있음을 느끼고는 있었다. 자신은 왜 언제나 무슨 일에도, 공부에도 열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고, 몰입해본 적이 없었던 것일지, 그리고 왜 이번 일에는 전에 없이 몰입하고 있는 것일지 아직 좀 더 질문해볼 여지가 남아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학교 설립 사업을 열심히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적 명분까지 만족시켜줄 만 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N은, 뛰어난 두뇌와 언어적 재능뿐만 아니라 풍족한 가정환경마저 갖추고 있던 자신이 어째서 세상의 그 어떤 일에도 열정을 못 느끼고, 오로지 ‘일류’만을 좇는 사회경제적이고 지적인 탐욕에 의해서만 동기부여 돼왔던 것인지에 대하여 더 깊은 질문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N의 더 깊은 의문 제기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상주의적 ‘기호’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교육사업과 연관시킨 것이라 하겠다. 집안이 몰락하기 직전, 자신에 대한 깊은 회의의 기운이 심상치 않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그 시점에 그녀의 내면을 가장 드세게 흔들었던 것은 죽은 B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일종의 가해자로, B를 피해자로 설정하고는, 자신은 실천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해 속죄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인 심리, 또는 의견이었고, 그 의견은 일견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 교육사업이라는 것에서 매우 적합한 해소의 장치를 만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이 N의 표면 의식이 포착할 수 있는 자아성찰의 한계였다. N은 자신이 왜 그다지도 B의 일에 대해서 분개했고, 가슴 아파했는지를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양심의 가책 수준의 감정이 아니라, 깊은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난 동질감의 발현이었다는 것까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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