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나무 뿌리 (2007/5/21)

신록의 계절의 숲은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5월 들어 내 삶의 최고의 낙은 숲속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숲은 주로 산속에 있기에, 숲길을 걷기 위해서는 산을 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자주 오르는 우리 동네의 청계산은 인적도 드물고 숲이 울창하여, 신록의 계절을 흠뻑 들이마실 수가 있다. 경사진 산자락을 오르다 보면 숲의 아름다움에 도취된다. 나 혼자서만 감상하기가 아깝다. 혼자 숲속을 걸으며 나무와 풀과 흙에게 속삭인다: '사랑한다, 고맙다.'

언제부터인가 이 산에 대한 고마움이 커지면서, 내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풀과 나무뿌리를 밟지 않기 위함이다. '자연보호'라든가 '생명존중사상' 같은 거대 명제를 염두에 두어서가 조금도 아니라, 그냥 연약한 풀잎을 밟기가 싫어서다. 단순히 나무뿌리가 까지는 게 보기 싫어서다. 헌데 경사가 완만하고 산길이 널찍한 곳에서는 이리저리 풀과 뿌리를 피해가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급경사의 좁은 오르막길에서는 발 디딜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못된다. 그래도 나는 미끄러운 경사 길의 나무뿌리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서 발걸음을 이어간다.

물론 나 하나 그런다고 해서 나무들의 삶에 큰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다른 등산객들이 그 뿌리들을 밟고 지나갈 테니까.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청계산 숲길의 많은 나무들이 뿌리에 상처를 입고 하나, 둘씩 쓰러져가기를 계속할 테니까.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나 하나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만큼 뿐인 것을.

나는 감상주의에 빠져있는가? 글세, 나는 뿌리에 상처를 입은 나무가 느끼는 아픔을 공감하지는 못한다 - 과연 나무는 아픔을 느끼기나 할까? 즉, 센티멘탈리즘에 젖어서 혼자 바보같이 좁은 등산 길을 비뚤비뚤 걸어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 감상주의가 아니라면 나는 그저 바보일 뿐인가? 아마 그런가 보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바보같다. (하지만 스스로가 바보같음을 알고 있으면서 계속 바보같이 산다는 것은 나의 바보性이 순도가 높지는 않다는 반증이겠다.)

조간 신문에 도올 선생이 윤리학자 피터 싱어와 대담한 기사가 실렸는데, 싱어 박사는 짐승들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확신하나 식물이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의 태도를 보였다. 그래, 사실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뭇가지를 꺾으면서 나무에게 '너 아프냐?'라고 물을 수도 없고. 그러나 싱어 박사의 태도에 나는 선뜻 찬동할 수가 없다. 그런 태도는 마치 우리가 식물이 고통을 느끼는지의 여부를 알지 못하는 한은 식물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문제는 내 편한 대로 잠정 결론을 내려도 되는 걸까?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싱어 박사는 현대의 합리적인 상식에 근거하여 우리가 아는 것들에 대해서만 판단하고자 한단다. 즉,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것들만 취급한다는 말이다. 이성으로써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또 말을 해서도 안된다는 자세를 실로 많은 철인들이 견지해 왔다. 우리가 '현대의 이성'으로써 알 수 있는 것들의 범위는 충분히 넓은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합리화는 지나치게 풍요로운 현실로부터 정보량을 배제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을 울타리로 에워싸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현실 세계의 지나친 풍요로움을 제거하고 계획이나 예측이 가능한 영역을 확대하여, 결국은 그것만을 '세계'로 간주하기에 이르는 전체적인 프로세스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1만 년 전 무렵부터 도시가 발생했는데, 도시화가 합리화를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예측과 조절이 가능한 영역을 공간 안에 확실하게 만들어 놓고, 그 공간의 내부에서 행해지는 것에 대해서만 높은 가치를 인정하려는 운동에 현실성을 부여하고자 했던 겁니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람의 신경조직이나 대뇌 내부의 과정과 무의식의 과정 또는 육체의 사용법으로까지 '내부화內部化'되어, 합리화를 꾀하고 개발해야 할 새로운 분야로 변모해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까지의 '인간' 개념까지 크게 동요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IT화가 그것을 촉진시키고 있습니다. 그에 대응해서 자본주의의 본질이 변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형성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자유'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 나카자와 신이치,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2002), pp. 208-209

신이치 교수의 지적대로 합리성은 제한을 뜻한다 - 바로 그 제한이 인류로 하여금 당대에 '유용'해 보이는 분야에 포커스focus를 맞출 수 있게 해줬고, 그것이 '발전'을 가능케 했지만. 현 시대는 이성으로써 알 수 있는 것들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당연히 이것이 합리적 자세이리라, 왜냐하면 감성이나 영감 같은 것으로 알 수 있었다고 주장돼온 수많은 '진리'들이 가짜임이 판명됐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여 이성 이외의 역량을 발휘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이른바 '신비'의 영역을 알려고 함이 철학적으로 헛될 뿐만 아니라 혹세무민의 위험마저도 내포하고 있기에 민주시민의 의식 고양에 장애물이 되기는 하지만, 위험하고 방해가 된다하여 그것을 완전히 내침으로써 과연 우리는 얼마나 안전하고 쓸만 한 문명을 만들어가고 있는가? 혹시 그러한 내침으로써 우리가 잃게 된 감성과 영감의 역량이 이성만큼이나 소중한 인간적 능력들이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나는 일상 생활에서 대놓고 사람들에게 이를 밝히지는 않지만, 나의 이성적 능력 말고 초월적 계시 - 또는 신성한 다운로드 - 를 통하여 선명하게 '알게' 된 진리들을 마음 속에 품고 살고 있다. 그 진리들은 피아의 분리의 허구성을 밝히는 사랑의 메시지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진리들을 '알고' 사는 나의 삶이 그렇지 못한 나의 삶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행복하다. 그렇다, 이성 이외의 기능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수용함으로써 내가 훨씬 더 잘 살게 됐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지극히 프래그매틱(pragmatic; 철학 용어를 자꾸 써서 송구함)한 이유로 나는 이성 이외의 역량을 작동시켜 세상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을 신중하게 지지한다.

나는 나무가 아파하는지 어쩐지 여부를 이성적으로 알 도리가 없다 - 아직은(식물의 통증감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한 다큐멘터리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만). 내가 이성적으로 알지 못한다 함이 내가 식물이 아파하는지 여부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될 수가 없음은 지당한 일이다. 어떠한 결론을 내리려 하든지 나는 더 알아야 한다. 더 알기 전에는 식물이 아파할 가능성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헌데, 나는 식물이 아파할 것으로 인간이 짐작하는 편이, 그렇지 않을 것으로 짐작하는 편보다 훨씬 더 인간 자체에게 유익하고, 즉 프래그머틱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는 생태계 파괴보다는 보존이 훨씬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자명한 명제를 상기할 때 매우 견고한 추측이다. 따라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나무 뿌리를 밟지 않으며 산을 오를 것이다.

나무가 아픔을 느끼는지의 여부를 연구하는 것은 여전히 과학의 영역에 속하리라. 허나 나무와 숲과 산에 '영'이 깃들었다거나, 요정이 살고 있다는 생각은 신비주의에 속한다. 신비주의의 수용 여부는 또 다른 이슈다. 허나 나무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이 인류와 자연의 공존에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의 연장선상에서, 신비주의의 수용까지는 못가더라도 신비주의에 대한 검토가 인류에게 유익할 수도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오도된 신비주의는 인간 정신을 좀먹는다. 나는 그것을 지극히 경계한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신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생태계 보존이라는 추상적 가치와 공리주의적 윤리에서가 아니라 실은, 나는, 내가 뿌리에 생채기를 내면 나무가 아픔을 느끼고 그것을 땅의 영이 감지한다는 믿음을 어렴풋이나마 갖고 있기 때문에 나무 뿌리를 밟지 않으며 바보같은 모양으로 산을 오르내리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시애틀 추장님의 명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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