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찬가

생명 예찬 (2007/3/5)

오랫동안 미뤄왔던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열대어 수조를 장만한 것이다. 둘째 나나의 등쌀에 못이겨서였다. 생물을 키운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생물이 됐든, 일종의 헌신(commitment)이다. 그게 부담스러워 계속 미뤄왔건만, 별 수 없이 나나와 할인점에 가서 그간 눈여겨왔던 수조 셋트를 사오게 됐다. 미리 인터넷으로 열대어 사육에 관한 기초 지식은 습득해두었건만, 판매원의 숱한 지시사항과 조언을 단번에 소화해내기가 어려웠다. 긴장된 마음으로 '물 생활'을 시작했고, 수질을 안정시키느라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 물고기 여러 마리가 송장이 되어 뒷뜰 '공동묘지(the Pet Cemetary)'에 안장됐다. 이끼가 창궐하여 이끼 제거용 물고기도 사왔다. 한 마리에 2천원이었다. 무심코 이렇게 지껄였다: "비싸네." 처음 샀던 놈은 한 마리에 5백원밖에 안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생명인데 어떤 놈은 비싸고 어떤 놈은 싸다는 현실이 순간 의아했다. 생명에 갑어치를 매길 수가 있는가? 인간은 정말 얼마나 오만한가?

수조의 물은 점차 안정돼갔지만, 뜬금없이 새우도 생기고 달팽이도 자라났다. 달팽이가 수초에 안좋다 하길래 잡아다가 별도의 물병에 담아두다 보니, 2주만에 20여 마리로 불어났고, 끝도 없는 광란의 쎅스 파티 끝에 그놈들이 산란해놓은 알도 백 개에 육박했다. 20여 마리의 물고기와 20여 마리의 달팽이에게 밥주고 물 갈아주고, 수초 관리하다보면 한 주일이 다 가는 것 같다. 후회해도 별 도리 없다. 생명 관리를 자임했으니 끝까지 책임을 질 수밖에.

생명 관리는 번거럽고 귀찮은 일이다; 자식 키우는 데 수반되는 일들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생명을 감상하는 일은 즐겁다. 일단 어렵게 환경 조성을 마치고 나면, 반짝거리는 물풀 사이로 헤엄쳐 다니는 예쁜 열대어들을 감상하는 것은 쉽게 질리지 않는 취미활동이나 다름없다. 산고 끝에 태어난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키우고, 마침내 그 아이가 부모를 알아보고 재롱을 부릴 때 크나큰 보람을 맛보지 않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 딸내미들이 재롱부리기라는 특별활동을 통해 이미 부모에게 할 효도를 다했다고 간주한다. 재롱부리기로 여러 해 동안 부모에게 헌신해온 아이들에게 보상을 베푸는 차원에서 나는 틈날 때마다 애들을 차에 싣고 여행을 떠난다. 실은 보상이라기 보다는, 딸들에게 세상과 자연을 보여주는 일 자체가 나의 즐거움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2월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를 틈타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홍천의 비발디파크라는 곳의 온천 풀장에서 물놀이를 하고 콘도에서 묵은 다음, 동해안으로 나아갔다. 주문진 조금 지나서, 미항으로 이름 난 남애항에 들러봤다. 식구들과 포구 주변의 방파제를 걷고, 해수욕장에 가서 거센 파도도 보았다. 그리고는 어시장 옆의 한 횟집에서 생선회 몇 만원어치를 샀다. 펄떡이는 생선의 목을 치고, 배를 가르고, 살을 발라내는 횟집 아줌마의 능숙한 솜씨를 나나는 열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반면, 언니인 시시는 끔찍하고 무섭다며 멀찌감치 도망쳐 있었다. 나의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횟감이 된 저 물고기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듯 싶다. 시시도 회 뜨는 과정을 보는 것을 무서워하기만 했지, 정작 상을 차려놓으면 생선 살점을 낼름 잘도 집어먹는다. 우리는 친절한 횟집 주인 부부가 얼음까지 넣어 잘 포장해준 횟감을 차에 싣고 그날의 숙박지로 향했다.

나는 아이들을 위하여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펜션을 예약해두었다. 양양 남쪽의 하조대에서 내륙으로 십여 분 넘게 들어가서 깊은 산골짜기 인적 드문 계곡 옆에 자리잡고 있는 이 펜션의 이름은 '풀하우스'(재작년 제주 여행 때 발견했던 펜션 이후, 본 싸이트에서 적극 추천하게 된 두 번째의 펜션). 결코 여행객들이 알아서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여행 떠나기 전 인터넷을 며칠을 뒤진 끝에 발견한 곳이었다. 홈페이지로부터 받은 인상은, 프로페셔널하면서도 인정많고 사람좋은 집주인이 정성을 기울여 지어서 운영하는 곳인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다락방이 딸린 소녀풍의 예쁜 방에 들어선 딸들은 환성을 질렀고, 그곳에서 우리 네 식구는 단란하고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가지고 간 생선회도 말끔히 해치웠다.

처자식들은 '예쁜' 인테리어에 반했는지 모르나, 나는 이 펜션의 자연 접근성에 매료되었다. 상당한 폭을 지닌 계곡의 바위 위에 지었기 때문에, 객실에서 계곡 물이 바로 보인다. 건물에 거의 붙을락 말락할 정도로 우뚝 솟아있는 장엄한 적송 몇 그루를 베어내지 않고 구조를 설계한 덕택에, 방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서면 그 아름다운 나무와 직면하게 된다. 또한 정식 포장도로에서 조금 비껴난 외진 곳에 자리잡은 까닭에 펜션 앞을 지나는 차량이 거의 없다. 호젓한 외딴 산장 같은 분위기,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있는 느낌, 바로 이것이 가장 내 마음에 들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친절한 펜션 주인은 호텔업에 오래 종사했던 분으로, 직장 생활을 접은 뒤 3년 동안 펜션 지을 터를 물색하고 다녔다 했다. 서울의 가족들과도 멀리 떨어져 이 외딴 곳에서 펜션 관리하며 생활하고 있는 주인은 실로 자연친화적 성향이 대단히 강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산속의 그 펜션 앞에는 우리 차와 주인 차, 단 두 대만이 서있었다. 나는 처자식과 함께 있어서 고적함을 느끼기 어려웠지만, 그런 곳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정말 고독할 것 같았다 - 혼자 일하고, 혼자 놀기 좋아하는 나같은 인간이 보기에도. 허나 만약 인간이라는 동종의 생명체 이외의 숱한 동·식물들을 함께 공존하는 생명체로서 느끼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외딴 곳에 혼자 사는 것이 반드시 고독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친화성이 높을수록 인간적 고독함은 약화되지 않을까.

그 다음 날 펜션 주인 아저씨와 아쉬운 이별을 한 뒤, 우리의 자연친화적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오대산 소금강으로 향했다. 마침 구정 연휴 바로 전 날이어서인지 소금강 계곡에는 인적이 없었다. 사람 만나기 힘든 산속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아내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텐데도 여전히 그런 적막강산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곡의 얼음을 깨고, 폭포에 돌팔매질을 해대며 그저 신나게 뛰어놀 뿐이었다. 두어 시간 계곡을 따라 걸은 뒤, 계곡 입구의 민박집에서 토종닭 한 마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풍성한 점심 식사를 했다. 경외의 대상이어야 할 또 하나의 생명이 우리 가족의 섭생을 위한 제물이 되고 말았다. 자연친화적 여행 길에 여러 생명의 도살이 수반되어야 함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일일런지.

사흘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새끼를 뱄던 열대어 한 마리와 그 짝인 듯 싶은 수컷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죽은 암컷은 다섯 마리의 치어를 출산했는데, 그 놈들도 그 후로 죄다 죽어 버렸다. 장례를 치르고, 폐사한 열대어 일가족을 애도하고 나서, 마음을 다잡고 정성껏 수조 관리에 들어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수조라는 인공환경이 안정을 찾은 것 같다. 생명 유지에 관한 알량한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여 제한된 환경 속에다 생명체를 가두어 놓고서도, 그만하면 '보기에 좋았다'며 자족하고 있다.

생명은 내가 키우는 것이 아니다. 제 스스로 자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키우는 줄 안다. 생명은 감상의 대상, 엔터테인먼트 재료가 아니다. 생명은 나와 똑같은 수준의 것이다. 그런데도 생명체를, 나라는 분리된 주체가 한 발짝 떨어져서 감상하는 하나의 대상, 하나의 객체인 줄로 착각한다. 자식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내가 키웠다고 내 것이 아니고 내 욕망을 대리충족시켜줄 대상도 아니며, 오로지 나와 동격의 존재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자식을 자신과 똑같이 여기지를 못한다. 내가 자유를 갈망하듯 자식도 똑같이 자유를 갈망하는 주체적 존재들인데도.

생명은 나와 같은 것이다. 혼자 조용한 숲속을 걷다보면 그것을 느낀다. 숲속에서 새소리를 듣고, 벌레의 움직임을 보고, 풀잎과 나뭇잎의 손길을 느끼다보면 그 모든 생명들과 나와의 분리가 허상인지, 나와 그들의 합일이 허상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숲에서 생명체들과 하나가 되어 '나'를 잊고 걷다보면 나는 평화가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그래서 평화와 하나가 되는 기술은 자연과 생명과 친해지지 않고서는 익힐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행복해지는 기술이다. 어린 시절에 자연과 친해지고 생명의 숨결을 느껴보지 못한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술을 익히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늘 자연 속으로 이끌고 간다. 행복의 기술을 터득해보라고.

그러면서도 나는 내 아이들을 종종 나와 동격의, 나와 똑같은 존재로서 대하지 못하고, 그들을 간섭하고 조정하려 한다. 어리석은 애비의 월권은 자식의 마음에 수축을 초래하고, 애비의 마음 속에는 자책과 회한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의 아픔은 인식의 확장을 위한 단초와도 같다; 심지어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자식마저 주체인 나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객체인 줄로 착각하고 있던 나에게, 자식은 나와 똑같은, 나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영혼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단초와도 같다. 왜냐하면 내 간섭으로 수축된 아이의 마음의 아픔을 나도 똑같이 느끼니까.

혹, 타인의 마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게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진 것일지 모르겠다. 허나 어항 속의 물고기의 아픔까지도 그렇게 느끼는 경지는 좀체로 상상이 안된다 - 탐욕스레 생선회를 먹어치우는 나로서는. 그래도 죽은 물고기를 손으로 건져낼 때에는 마음이 조금은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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