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터

프레데터 (2007/12/16)

나는 사립'국민학교'를 다녔다.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었지만, 부모님께서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 나를 부잣집 애들이 많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집어 넣으셨다. (우리 집은 아주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 학교에서 평균치보다 가난한 편에 속한다고 느꼈었다.) 아무튼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닌 그 학교의 선생님들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분들로 인정받았다. 그중에서도 5학년과 6학년, 이태 연속 내 담임을 맡았던 분은 학교에서도 손꼽히는 모범 교사였다. 그 선생님은 마치 '바른생활' 교과서 속의 성인군자가 현실에서 체화한 듯이, 그야말로 꼿꼿하고도 바르기 그지없는 모범 교사였다. (너무도 '바른생활'이어서, 지금 회고해보면 코믹할 정도다.) 그 선생님의 자세와 몸가짐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단 한 번도 수업을 게을리 하거나 학생지도를 소홀히 했던 기억이 없었다. 그 선생님의 판서는 예술이었다. 교과서 속의 글씨보다도 더 바르고 예쁜 글씨를 분필로 희안하게도 똑바로 쓸 수 있는 신기한 능력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게다가 그 선생님은 사립학교의 드센 치맛바람 속에서도 '돈 밝힌다'는 비난 한 번 받지 않았던 청렴한 선생님이었다. 학부모들은 그분을 '인격자'라고 불렀다. 나를 비롯한 학생들은 다들 그 선생님을 존경했다. 아니, 마음속으로부터 어떤 감동을 받아서 존경했다기 보다는, 당연히 그런 선생님을 존경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믿었었다.

최근 들어 초등학교 동창들을 간혹 만났다. 그중에는 여자 동창들도 있었고, 여자 동창들에 관한 소식을 전해주는 남자 동창들도 있었다 - 삼, 사십 년 전의 동창이란 이름을 기억해내기도 어려운 존재들이지만. 그런데 그들 중 몇몇이 내게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전해주는 것이었다. 2년 간 나의 담임이었던 바로 그 '바른생활' 선생님이 여러 명의 여학생들을 성적으로 농락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우발적이 아니라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여자애들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신체 부위를 만지거나, 또는 몸을 껴안았다는 것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이야기를 들은 후에 - 피해 당사자인 여자 동창들이 술자리에서 어렵게 토로한 증언을 포함하여 - 나는 결론지었다. 그 선생은 소아성애병자(pedophile)이자 소아성추행자(child molester)였다고.

어린 시절에 믿고 따랐던 '은사'의 시커먼 내면을 알게 된 충격으로 인해 불혹의 나이를 한참 넘은 남자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질 것까진 없겠다. 그러나 여전히 그 사실은 충격적이다. 변태적 아동성욕자에 관한 미국 FBI의 수사 리포트와 학계의 보고 등에 대해서 나는 꽤 소상히 알고 있는 편이다 - 미국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관계로. 그들은 거의 치유 불가능한 정신병자들이어서, 평생토록 아동에 대한 성욕 해소를 삶의 목표로 삼고 사회속에 숨어서 살고 있는 일종의 비열한 포식자들(predators)과도 같다. 미국에서는 그런 인간들이 법망에 의해 대단히 많이 검거됐고, 그래서 그런 범죄인들에 대한 자료가 풍부하고 사회적 이해도도 높다. 그런 이들이 많이 찾게 되는 직업이 유치원이나 학교 선생, 또는 성직자 등이다 - 아이들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으므로. 몇 해 전 일어난 미국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폭로 사건도 그 한 예이다. 즉, 이들은 가장 양심적이어야 할 직종을 지극히 비양심적인 학대 행위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선택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들의 내면은 정신분석학적으로 초의식(super ego)이 거의 부재한 상태여서 양심이나 윤리감각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으며, 심한 경우에는 타인에 대한 감정이입이 불가능해서 연민을 느끼는 기능마저 결여돼있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사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할 수 있다(이런 측면은 연쇄살인범들과도 유사하다; 나는 미국의 범죄 자료를 100% 신뢰하지는 않으며, 이들의 회개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미국 범죄과학의 한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심히, 매우, 동정한다. 천형(天刑)을 안은 채 살고 있는, 지극히 불쌍한 이들이라고 본다 -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대체로 후천적 요인, 즉 성정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결정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피해 아동을 생각하면 그 동정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특히 딸을 둘이나 키우고 사는 나같은 애비 입장에서야 말할 나위 없다.

바른생활의 화신과 같은 이가 변태적 소아성애병 환자였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살다보면 세상에 이런 일이 참 많다. 그럴 때마다 새삼 놀라는 것이 촌스러울 정도다. 내 마음은 여전히 촌스럽다. 아무튼 이런 아이러니를 하도 많이 접하다보니, 어느덧 말끔한 겉모습, 반듯한 태도, 모범적인 언설을 통해서 순결, 진실, 청렴, 정의 등등을 외치는 이들은 거의 죄다 일단 의심하고 보게 됐다 - 사실, 그런 가치들을 밖으로 일부러 드러내는 이들 치고 진실로 그런 가치를 내면화한 이들이 드물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도덕주의를 싫어한다. 내가 남들에게 '도덕군자' 노릇은 안하고 있는지 스스로 경계하기까지 한다 - '착하게 살자'는 얘기 같은 건 내 학생들에게도 안한다. 안에는 악마가 들어차 있는 인간이 밖으로는 빛과 정의를 외치는 아이러니와 모순성, 이런 것이 바로 인간 세상이다. 아니, 안이 검을수록 밖은 희게 보이게 하려는 게 사람 심리이기도 하다. 구두를 번쩍거리게 닦아놓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 사채업자나 포주 같은 이들이 많은 것처럼. 하루에도 십수 번씩 손을 닦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의 정결치 못한 부분에 대한 강박증의 포로인 것처럼. 집무실에는 항상 난(蘭) 화분을 여러 개 진열해두어야 하는 부패한 공직자처럼. 삶을 이해하는 것은 모순을 수용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과 악이 항상 공존하는 인간의 내면이 바로 모순 그 자체다. 자신 내면의 사악한 욕구를 교묘히 숨기고 있다가 때로 기회주의적으로 그 욕구의 해소를 기도하는 이들이 아동성추행자들이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치열한 내적 투쟁을 통하여 제 안의 악마를 잠재울 수 있었던 이는, 그 과정에서 악마의 가공할 힘을 체험해보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처절한 한계를 절감한다 - '내 안의 저 악마가 언제 힘을 얻어 튀어나올지 몰라!'. 그래서 그는 겸허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차마 타인들에게까지 목청 높여 외치지는 못하여도, 저 혼자서나마 사랑과 정의의 삶을 살아보려고, 그저 그것을 실천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런 삶속에서 용기를 쌓게 되면, 그는 악마에 관해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해줄 수 있게 된다. '사람들아, 악마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라!'고. 그는 삶의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자다. 엄격한 정의의 사도들 보다는 이처럼 겸허한 이들이 많아야 한다.

소아성애병자 중에는 자신의 아동에 대한 성욕을 평생 자신 속에만 비밀리에 간직하고 실제로 아이를 성추행하는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이들의 수도 굉장히 많은 것으로 미국의 범죄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 엄청난 규모의 인터넷 아동 포르노그라피 유통량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그러나 이들중의 소수는 실제로 제 욕구를 아동들에게 분출한다. 그들은 사회라는 밀림 속의 비열한 프레데터로 숨어살고 있는 것이다. 힘없는 아이들에게 씻기 어려운 정신의 상처를 입히는 이 프레데터들의 성욕은 현대문명사회 속의 뒤틀린 성적 욕구의 한 예일 따름이다. 이 프레데터들의 '성욕'이라는 것은 순전히 쎅슈얼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정복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과도 결부돼있다는 것이 범죄학계의 일반론이다. 유형과 분야는 다르지만, 이같이 뒤틀리고 폭압적인 소유적 성욕의 예가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은가? (노골적인 인권 유린이 자행되는 이른바 '북창동식 쇼' 따위가 아무렇지 않게 광고되고 있다든지.) 소아성추행자와 같은 프레데터들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어쩌면 뒤틀린 성적 억압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물론,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탁상공론에 불과한 말이지만. 어찌 됐든, 성적 억압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조금이나마 해방시키는 일은, 내 생각으로는 마광수 같은 이들에 대한 사회문화적 탄압을 거두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 보다는 쎅스에 대해 솔직한 제 마음을 밝히는 마광수 같은 이들의 수가 늘어나야 쎅스가 보다 당당하고도 발랄하게 공론의 장에 등장하지 않겠는가. 성욕을 음습하고 병든 마음속에 가둬두면 둘수록 프레데터들이나 양산될 것이다. 위선자들 보다는 마광수처럼 솔직한 이들이 많아야 한다.

엄격하고도 정의로운, '바른생활'의 모델이었던 담임선생은 악질적인 위선자였다. 이런 모순이 삶이라지만, 기분은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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