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도덕

공중도덕 (2007/4/16)

신문이나 인터넷 포털 등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중도덕 정신이 투철하지 않다고 힐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와 쓰레기를 보거나, 전철 탈 때 내릴 사람 다 나온 다음에 승차해야 한다는 것 정도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봐도 그런 힐난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 뉴스를 써핑하던 중, 길에 떨어진 꽁초만 봐도 분노한다는 어떤 이의 글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양반, 꽤나 공중도덕 강박증세에 걸려있구만' 하는 반응과 함께, 바로 나 자신이 그런 강박증으로부터 그다지 자유로운 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새로 이사온 집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마구 담배꽁초를 버려댄다며 혀를 차며 힐난하실 때, 나도 맞장구치며 함께 욕을 해댔다. 실은, 나도 공중도덕 강박증 보유자다. 나는 전철 안에서 이어폰 소리 크게 울리며 음악 듣는 젊은이를 그냥 못봐주고, 굳이 볼륨 줄여달라 요청하는 중년 아저씨다. 평소에는 타인들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까다로움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물'임에도 불구하고, 공중도덕 위배에 대해서는 적극 시정을 요청하는 묘한 심뽀를 지닌 아저씨다 - 초자아(super ego)의 과잉 발달?

그나마 내 경우는, 자신이 그런 강박증을 갖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기에 나름대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 하겠다. 물론 대원칙은 공중도덕과 질서를 준수해야 한다는 강령이겠으나, 그런 '준수'에 지나치게 집착함은 강박증에 다름없다고 본다. 특히 그 강박증 속에 공중도덕과 질서의 위배자에 대한 감정적인 공격심리까지 내포돼 있다면, 이는 순수한 공동선의 수호 차원을 넘어서 타인에 대한 부정적 심리의 투사(projection)와 같은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로 변질될 소지 또한 갖고 있는 셈이다. 나는 그러한 심리적인 문제로 변할 소지를 내가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고, 동시에 그런 문제를 계속 부둥켜 안고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래서 공중 도덕과 질서 준수의 태도를 버리지는 않되, 그에 대한 과도한 집착 심리는 경계하며 관찰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에 부정적 감정이 피어오르고 타인을 공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범생이'로서의 내 공중도덕 준수정신의 잣대를 타인들에게 갖다 댄다면, 그 엄격한 기준으로 인하여 수많은 동포들이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형편없는 인간 군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들 모두가 형편없는 인간들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의 공중도덕 '위반'이 상습적인 만행이 아니라 어쩌다 일어난 우발적 실수일 경우도 많을 것이다. 문제는 '너나 잘하세요'의 금언이 이 경우에도 나 자신에게 역시 적확히 적용된다는 데 있다; 나 자신도 그런 실수 저질러서 타인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아본 경험이 여러 번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른바 '선진' 사회나 우리나라의 경우나, 공중도덕 준수라는 측면에 있어서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점에 있다; 미국 명문대 캠퍼스에도 담배 꽁초나 콜라 캔 나뒹군다. 이런 저런 경우들을 통해 객관적으로 종합해볼 때, 타인들의 공중도덕 위배 행동에 대해 엄격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제 눈의 들보는 못본 주제에 남의 눈의 티끌을 탓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헌데, 이와 같은 '공중도덕의 준수와 위반'이라는 케이스에 대한 객관화 시도보다도 더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내가 보지해왔던 엄격한 힐난의 태도를 경원시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다. 그건, 내 자아의 온전한 발현이라는 개인적인 희구다. 개인의 자아와 사회의 집단 의식이라는 상이한 차원을 조금 뒤섞는 논의상의 무리가 있지만, 나는 싱가포르처럼 공중질서가 엄격하게 규제되는 곳에 한 번쯤 구경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숨이 탁 막히지 않을까? 그런 규제가 설사 시민 다수에 의해 내면화된다 해도, 그런 내면화가 완전할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 심리적 억압이 축적되어 오히려 반사회적 행동이 삐져나오게 되지는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든다 - 물론 아직까지의 관찰에 의하면 잘 돌아가고 있는 모범 사회인 것으로 보이지만. 질서도 좋지만, 자유도 귀중하다. 양자 사이의 밸런스를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꿔 말해서, 내 자아가 온전히(completely) 발현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타이트한 규제나 질서와 더불어, 풀어주고 늘어지는 자유로움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엄격하게 꽉 조이기만 하면 자유로움이 질식한다. 내 자아는 질서와 자유 둘 다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자아의 온전한 발현'이라는 생각은 6, 7년 전쯤 서양의 교육사상을 공부하다 장 자크 루소의 '내면의 화해'라는 개념에 매혹되었을 때부터 견지해오다가, 핀드혼의 자아성숙 프로그램을 공부하고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는데, 최근 들어 작가 김형경의 정신분석학적인 책에서도 그에 대한 훌륭한 설명을 접할 수 있었기에, 그것을 옮겨본다:

내면에 억압해둔 어둡고 위험한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밝고 건강한 의식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양가감정을 통합한다'고 일컫습니다. 양가감정을 통합하면 자아가 강해집니다. 내면을 억압하는 데 쏟던 에너지를 거두어 자아가 흡수하기 때문입니다. 양가 감정을 통합하면 또한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 됩니다. 억압하고 외면해둔 내면에는 엄청난 지혜와 창조성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부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고 사랑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게 되며, 그때 진정한 마음의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 김형경, 『천 개의 공감』, 한겨레출판사, 2006, p. 63

위의 주장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창의적인 인간들의 특성에 대한 관찰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창의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어느 한 쪽을 억누르느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내면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부분들 전부를 기꺼이 수용하는데, 이런 포용성(= "양가감정의 통합")이 창의력을 촉발시켜준다고 한다. 김형경은 창의성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인격적 성숙에 대해서도 아름답게 설명해준다:

초자아가 약해지고 원본능에 대한 지나친 억압이 해체되면 절로 자아가 강해집니다. 그렇게 해서 정신의 구조에 변화가 오면 궁극적으로 성격이 달라집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완고하던 (초자아의) 측면이 사라지고, 항상 날카롭고 긴장되어있던 (원본능의) 측면도 완화되어 관대하고 편안한 성격이 나타납니다. - 위의 책, pp. 69-70

나는 내가 타인들의 조금은 느슨한 공중도덕 및 질서 정신을 준엄한 심판관의 기준을 갖고 바라볼 때, 내 자아의 온전한 발현에 대한 장애 요인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관대하고자 한다; 남들을 힐난하고 비난하고만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 따라서 이 사회에 어쩌면 실제로 만연돼 있을런지도 모를 공중도덕 정신의 부재라는 현상에 대한 나의 거의 유일한 이성적인 대응은, '나나 잘하자'다. 나는 워낙에 잘 하니 나부터라도 잘해서 솔선수범하자는 말이 아니다; 실은, 나도 종종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함이다. 정말, 김형경의 책에도 인용돼있는 괴테의 말마따나, 세상에서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 함부로 도덕군자인 양,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자.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나는 원체 좀 부드럽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다. 우리 사회도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금씩 나아졌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적고 말려 했는데 우연찮게 인터넷에서 철학자 김형효 선생의 다음과 같은 글을 접하게 되어 잘라다 붙인다:

불교는 여여한 자연의 이법을 가르치는 종교이기에 반자연적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다. 불교는 본능의 이기배타적 소유욕을 본성의 자리이타적 존재론적 욕망(원력)으로 마음의 자세를 바꾸기를 종용하지, 당위적 명분론의 도덕론자들처럼 본능의 소유론을 억압하는 반본능의 사회도덕론을 지도적 이념의 깃발로 흔들지 않는다. 당위적 명분론은 별로 효력이 없다. 첫째 그것은 제6식인 의식의 도덕적 각성의 차원이기에 전의식인 제7식과 무의식인 제8식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도덕의식이 지도적 권력이 되면, 욕망은 잠복해서 숨어 있을 뿐이지 소멸되지 않는다. 둘째 도덕의식과 의지는 본능의 무의식적 소유욕을 싫어하는 사회적 공동선을 앞세운 또 다른 소유욕일 뿐이다. 도덕의식은 반본능적 도덕의지의 지배와 승리를 기약하는 새 세상만들기의 이상일 뿐이다. 그 이상이 지금까지 헛수고로 끝났다. 도덕이 자연스런 욕망을 이기지 못한다. 21세기의 불교는 세상을 사회도덕적으로 혁명하기 위하여 도덕의 길을 예비하지 않고, 본능의 소유욕을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인 원력으로 바꾸기를 종용한다. 그것이 세상을 경제적으로도 망가뜨리지 않고,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세상을 유효하게 경영케 하는 보살의 길이겠다.

- 출처: http://kr.blog.yahoo.com/k41i01s01/1239563.html?p=3&pm=l&tc=48&tt=1176709553

"본능의 소유욕을 본성의 존재론적 욕망인 원력으로 바꾸기"라는 어려운 말을 나름대로 풀어보자면, '나와 타인을 구분하여 욕심스럽게 자신의 도덕률을 타인에게 강제하기 보다는, 나와 타인과 우주가 모두 연계돼있음을 깨달아 나와 타인의 내면으로부터 자연스러운 덕성이 표출되도록 하자' 정도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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