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어둠

삶의 어둠을 끌어안기 (2007/5/27)

둘째 딸 나나가 작년에는 유치원 등원거부 선언 후 한 반 년쯤을 백수생활하더니만,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신나게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최근에 접하게 된 몇몇 아이들의 다소 폭력적인 행동에 신경이 꽤 쓰이는 것으로 보였다. 하루는 저녁 식탁에서 아이를 슬쩍 떠볼 요량으로, '아빠가 학교에 가서 그 녀석들 혼내줄까' 물었더니 - H그룹 회장님처럼 -, 아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만,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엄마와 아빠가 매우 기특해 하며 씩씩하다고 칭찬을 해주자, 어깨를 으쓱이며 이렇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람은 불행한 일도 당해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어떻게 할지 알지."

만 육세 먹은 딸내미의 말을 듣고 나는 존경하는 쏘크라테스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평탄한 삶은 인간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다."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다함은, 평탄한 삶이 인간이 태어나서 숨쉬며 살아가는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서, 삶의 목적이 편안함의 확보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 목적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숨쉬며 살아가는 그 의미를 깨닫고 그 깨달은 바를 실천함에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고뇌도 역경도 없는 밋밋하고 평탄한 삶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변화와 굴곡없이 어떻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볼 기회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성인은 불행과 역경을 두 팔 벌려 기쁘게 맞이하셨나 보다. 삶에 어둠이 주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 자신의 본질을, 진정한 자신을 용감하게 드러내보라고. 삶의 편린의 철저한 무의미성을 폭로함으로써 더 똑똑해지려 할 것도 없다. 어차피 의미란 밝혀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게 주는 것이다.

삶의 어둠을 피하려 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 이 정도는 삼, 사십 년만 살아봐도 깨칠 수 있는 상식이다 - 굳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나를 찾아오는 행복과 밝음을 환영하듯이, 나를 찾는 숙명의 어둠도 환영할 일이다.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고, 어차피 오게 될 삶의 어둠, 이왕이면 쪼그라들지 않고, 커다랗고 온전한 나로서 맞이함이 옳다. 또한, 편하게만 살려 해봤자 그도 아무 소용 없다. 운명의 씨줄과 날줄의 얽히고 섥힘을 무슨 수로 피해갈 수가 있겠는가. 인간에게 적합한 태도는 귀챠니즘이 아니라 용기다. 귀찮고, 부담스럽고, 힘들다며 회피하고 미뤄봤자 삶의 어둠(또는 나의 영적인 진화를 위한 프로그램 속에 계획된 챌린지 스테이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제대로 처리할 때까지 계속 되풀이하여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한 번은 용감하게 맞설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 어차피 삶이란 이 게임이 평탄함을 지향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난 주에 폭우가 쏟아졌다. 그날 일이 있어서 폭우를 뚫고 사직동 부근을 걷고 있었는데, 내가 서있던 곳 바로 곁에 벼락이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굉음과 섬광이었다. 여직껏 그렇게 가까이서 벼락 떨어지는 걸 본 적은 없었다. 순간, 내 우산에 벼락이 떨어지면 어쩌나 겁이 났지만, 우산을 접었다간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것 같아 그냥 철제 우산을 들고 걷기로 했다. 바지는 허벅지 아래로 다 젖어버렸고, 신발 속엔 물이 찼다. 젖은 몸으로 서너 시간 더 용무를 봐야 하는 것이 찝찝하긴 했으나 실은, 나는 폭우가 고마웠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쾌한 폭우가 없으면 세상이 얼마나 심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엔 비 오는 날이 참 싫었다. 밖에서 뛰어놀지도 못하고, 비좁은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싫었고, 비내리는 날의 흐릿하고 어두운 색깔만으로도 금세 울적해졌다. 나이를 먹고 보니, 비오는 날도 참 좋다. 빗소리는 축복이다, 대지와 내 마음을 촉촉히 적셔주는. 벼락도 은총이다, 세상과 나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는. 실로, 이 비가 없으면 사람이, 이 땅 위의 만물이 어떻게 살 수가 있나. 정말로 고마운 비고, 필요한 비다. 가수 비가 거침없이 뜨는 것과 비(雨)의 위대함이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Rainmaker'라는 영어 단어에 담겨 있는 전능하다는 뜻이 단순히 인간중심적 수자원 확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생태계 전체에 대한 경외심도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젊어서는 비가 싫었지만, 늙어가며 그 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고, 그러다보니 비를 사랑하게 돼버렸다. 비오는 날에는 마음이 착 가라앉고, 땅의 해갈을 축하하며 즐거운 기분이 든다. 젊어서는 삶의 어둠이 무조건 싫었지만, 늙어가며 그 어둠의 소중함에 조금씩 눈뜨게 된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어둠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그리 되면 어두운 고난의 나날이 닥친다 하여도 마음의 평화를 놓치지 않을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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