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화해

호연지기와 화해 (2007/6/16)

나는 숫타니파타의 다음 구절이 정말로 좋다:

숲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글의 심오함과 멋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 구절을 되뇌이면 발생하는 심리적 효과가 마음에 든다. 그건, 실제로 내가 "묶여 있지" 않아서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는 숲속의 사슴처럼 살고 있기 때문에, 마치 내가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지혜로운 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마 수중에 돈이 떨어졌을 때에는 딴 데서 위안을 찾으려 드는 내 마음의 장난이렸다.

어쨌건, 나는 오늘도 독립과 자유를 찾아 산을 오른다. 두 시간 이상은 시간을 내지 못한다. 나도 할 일 되게 많고, 공부할 거리도 쌓여있고, '집필'이란 것도 해야 하기 때문에. 집 앞의 청계산을 늘 오르는데, 그간 청계산 오르며 기도도 많이 했고, 정신병자처럼 나무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으며, 또 나무 뿌리도 안 밟으려고 애를 쓰며 다닌 탓인지, 이즈음 들어서는 산이 이런저런 재미난 선물들을 내게 던져주는 것만 같다. 선물이란, 산에 사는 여러 짐승들이다. 등산로를 벗어나서 길없는 깊은 숲을 헤치고 다니다 보면, 꿩이나 다람쥐는 자주 만난다. 그밖의 친구들도 많다.

지난 주에는 뱀을 만났다. 길이가 1미터도 넘는 구렁이었다. 어렵게 만났는데 그냥 지나치기가 섭섭해서, 길다란 나뭇가지로 녀석의 주변을 툭툭 건드렸더니만, 바로 고개를 빳빳이 치들고는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짜식이 승질머리 하고는...' 나는 킬킬거리며 고놈 머리에 나뭇가지로 꿀밤이나 한 대 먹일까 하다가, 슬그머니 물릴까 겁도 나고 해서 그냥 '빠이빠이'하고 돌아섰다. 자연 속에서 야수와 대면하는 것은 매우 신비로운 느낌을 준다. 예전에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의 숲속에서 야생 곰 가족과 조우했었는데, 겁이 나기도 했지만 참으로 신비로운 매혹에 휩싸였던 그 감흥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엊그제는 산속의 저수지 부근에서 아주 똘똘해보이고 덩치도 큰 청설모 한 마리를 만났다. 그 녀석은 저수지 주위를 둘러싼 나무 울타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다가가도 도망칠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고놈 기특하군' 하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호연지기가 딴 게 아니다. 명산대천을 찾아 기개를 펼치는 것 말고도, 생물과 교감을 느끼는 미세한 작용도 당연히 호연(浩然)의 기에 포함돼야 한다. 꽤 커다란 청설모의 새까만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보니, 그놈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마음이 그 눈처럼 새카만 암흑이요, 공(空)인 것처럼만 보였다. 아, 정말 청설모에게는 마음이 없는 것일까. 그 녀석은 거의 삼십 초쯤을 나와 그렇게 마주보고 있다가 가버렸다. 나는 "얘, 잘 가라"고 작별인사도 했건만, 마음도 없는 그놈은 인사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허나 짐승한테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이 거만하게...'라며 유교적 가치관을 들이댈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가슴 찡하게 느낀 것은 바로 청설모의 가치초월적 존재감이었다. 그것은 암흑의 우주 공간과 맞닿아 있는 듯이 텅 비었고 무심한 그 무엇이었다. 인간과 함께 살며, 인간의 마음이 투사돼 인간처럼 행동하게 된 애완동물과는 다른 그 무엇을 야생의 짐승들은 보유하고 있다. 무심한 자연의 완전한 일부인 무심한 청설모. 그는 자유의 존재였다.

나는 그런 자유를 모른다. 인간은 그런 자유를 모른다. 인간은 자연처럼 무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주처럼 광활한 자유를 품고 있는 듯이 보이는 저 청설모조차도 무심할 수 없는 나의 눈에는 한 순간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작은 머리통과 큰 눈망울, 오물거리는 입 같은 것들이 귀여웠다. 이렇듯 인간인 나는 제 마음을 야생 짐승에게 투영하고야 마는 것이다. 문득 위대한 신화학자 죠셉 캠벨의 깊숙한 조언이 떠올랐다:

"신화가 지니는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마음과, 다른 생명을 죽여 그것을 먹이로 삼는 잔혹한 삶의 전제 조건을 화해시키는 것이지요."

태고적 인간도 저런 작은 짐승을 귀엽게 느꼈을까? 캠벨은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다. 자그마한 짐승이 아무리 귀엽다 하더라도, 나와 내 새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앞의 귀여운 저 짐승을 잔인하게 쳐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다. 작은 짐승을 귀엽게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그놈을 잡아먹는 것이 본성일까? 캠벨은 전자를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본성으로 봤다. 정말로 귀여워하는 마음, 측은지심, 이런 것들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삶은 그 타고난 본성을 매 순간 배반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는 냉혹한 장이다.

군 시절, 정예 수색대에 차출돼서 극한의 훈련을 겪었던 사촌형이 들려준 얘기가 떠올랐다. 상병 쯤 되어 군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 잡혔을 때 휴가를 나왔다가 나와 만났을 때 들려준 이야기다. 수색대에서는 신병들에게 잔인성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서, 살아있는 토끼의 두 귀를 손으로 잡아서 찢어죽일 것을 강요한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 즈음의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재차 물었었다. "형, 진짜로 형도 죽였어?" 어린 시절 큰댁 뜰에서 함께 방아깨비와 땅강아지 잡으며 뛰어놀았고, 예민한 미술적 감수성을 보유했던 그 사촌 형은 내 질문에 그저 씩 웃었다. 깊숙이 눌러쓴 군모 아래로 형의 눈은 날카로운 살기와 같은 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형의 눈빛을 보고는, 이제 그런 것쯤은 손쉽게 할 수 있는 잔인함을 형이 터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도, 저 귀여운 짐승을 쳐죽이고, 찢어 죽이는 처절한 삶이 자연을 따르는 삶일 것이다. 만약에 인간이 여타 짐승들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면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침팬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침팬지들이 다른 종류의 원숭이를 맨손으로 잡아먹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자신과 유사하게 생긴 생물을 산 채로 찢어먹는 것이었다. 그 장면이 아무리 잔인하여도, 침팬지를 욕할 사람이 있는가. 그것이 그저 무심한 자연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자연에 동화가 되지를 않는다. 도대체 무심함을 터득하지를 못한다. 수렵을 주업으로 삼는 북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의 부족들 중에는 사냥해서 잡은 짐승의 영혼을 위해 감사의 제를 드리는 부족들도 많다. 인간은 왜 침팬지처럼 무심하게 잡아먹지 못하고, 죽은 짐승을 불쌍히 여기고, 자신을 위해 먹이가 돼줌에 감사까지 하는 것일까? 정말로 캠벨이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한 것일까?

나는 과거에 계시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이 사랑임을 알았다. 그 절대적인 앎의 연장선 상에서, 인류라는 독특한 생물종은 여타 짐승들과는 달리 측은지심을 본성으로써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직 나의 성찰과 사유가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연역적으로 캠벨의 관점에 동의한다. 헌데 중요한 것은, 캠벨은 우리의 본성과 삶의 잔인함 사이의 모순을 신화가 화해시켜준다고 한 점이다. 캠벨이 다루는 오만가지 신화들에서도 그런 화해의 모습이 등장하지만, 예수의 신화 역시 화해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들 인간의 마음, 인간의 내면의 화해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예수님이 인간의 도덕적 가치관으로써의 선(善)만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의 화해를 주창했다고 믿는다. 내 믿음은 기독교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허나 예수님이 주창한 화해의 차원의 상위 차원에는 신성(神性)의 지선(至善)이 엄연히 자리잡고 있고, 궁극적으로 화해가 타협이나 중립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나의 믿음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화해의 메시지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다음의 글이 마음에 든다.

저 멀리 시대에 뒤처진 은하계 서쪽 소용돌이의 끝,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그 변두리 지역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작은 노란색 항성이 하나 있다. 이 항성에서 대략 구천팔백만 마일 떨어진 곳에 시시하기 그지없는 작은 청록색 행성이 공전하고 있는데, 이 행성에 사는 원숭이 후손인 생명체들은 어찌나 원시적인지 아직도 전자 시계가 꽤나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이 행성에 사는 사람들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수많은 해결책이 제시되었는데, 이 해결책들은 대부분 주로 작은 녹색 종잇조각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볼 때, 불행한 것은 그 작은 녹색 종잇조각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냥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열했고, 그들 대다수는 비참하게 살았다. 심지어 전자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말이다.

애당초 사람들이 나무에서 내려온 것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는 의견이 점점 더 확산되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나무에 올라간 것조차 잘못된 일이었으며, 아무도 바다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도 말했다.

그러던 중 어느 목요일, 그러니까 한 남자가 기분 전환도 할 겸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 지 약 이천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목요일 ....

-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책세상, 2005, pp. 19-20

애덤스가 그린 예수님은 인간들끼리의 화해를 제언했고, 내가 믿는 예수님은 그것말고도, 한 명의 인간인 내 마음 속의 화해도 권유하셨다 - 타인과의 화해를 가능케 할 필연적 전제 조건으로서. 선사 인류가 동물을 잡아먹고 살기 시작한 이래로 현존 인류 대다수가 대량으로 가축을 도살하여 먹고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간에게는 내면에 본성과 생존 사이의 갈등이 지속돼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 갈등과 모순이 바로 나의 내면에도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태생적으로 하늘의 빛을 품고 태어난 인간이, 신성인 사랑을 본질로 지니고 있는 인간이, 제 육신의 보전을 위해 짐승을 잔인하게 죽이고, 나무를 베고, 땅을 갈아엎어야 하는 현실. 야생의 짐승은 그저 있는 그대로 자연과 우주와 합일돼있을런지 모르나, 인간은 이런 내면의 모순을 화해시키기 전에는 우주와의 합일이나 진정한 자유를 획득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사랑'이라는 우주적 본성에서 비롯됐을 측은지심 같은 것 자체가 인간이 짐승처럼 무심한 자연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짐승과는 다른 과제를 안고 태어난 존재인 것 같다.

일단 나는 계속 산의 정령에게 질문을 해보련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들을 여러 선현들의 가르침을 통해 받아왔으나, 그 가르침의 효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못한다. 나는 최소한 적극적으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때로 내가 심판한 악에 대해서는 똑같은 악으로써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 안의 악의 엄연한 상존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궁리 끝에, 일단 호연지기라는 방법도 열심히 써먹어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적성에 맞기도 하고.

'아나콘다2'를 텔레비에서 봤다. 젠장, 아마존에서 호연지기는 불가능했다. 독거미와 거머리와 살인마 뱀이 살고 있는 거친 정글 속에서는. 이 땅의 자연이 사랑스럽다. 무심한 자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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