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2007/3/26)
©
Suk Hoon Han
전북
무주 리조트라는 곳에 와있다. 손주들 재롱 보는 낙에 사시는 장인,
장모님을 모시고 오려했는데 장모님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장인어른만
모시고 왔다. 처가 어른의 경우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좋은 곳으로
모시고자
하면 처음에는 사양하고 빼시지만, 함께 놀러가면 아주 좋아하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아내도 좋아한다. 내가 착한 사위여서가 전혀 아니라, 철학자 벤섬
식으로, 이왕이면 '더 많은 이들의 행복'이라는 성과를 거두는 편이
낫다 싶어, 우리 가족 여행에 어르신들을 추가로 모시고 가는 것이다.
장모님도 함께 하셨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오늘도 금요일 오후
늦게 출발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여행 기분 내고 군것질도 했고,
콘도에 여장을 풀고 괜찮은 식당에서 정갈한 식사도 했고, 기념품 가게에
가서 아이들 볼펜도 사줬으며, 노래방에 가서 장인어른은 '울고 넘는
박달재'도 한 곡 뽑으셧으니, 나름대로 보람있는 하루를 보냈다 할 수
있다.
나는 과거에 처가와 심각한 알력이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나를 사위로 삼는 것을 처가에서 극력 반대했기 때문이었고, 둘째, 처가
어르신들을 겨우 설득하여 결혼한 후에도 나와 장모님 사이에 살벌한
충돌이 몇 번 있었으며 - 더러운 내 성질머리 때문에 -, 셋째, 이러한 연유로 내가 묵직한 감정의 앙금을
마음 속에 품은 채 좀체로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처가와의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해소의 과정 도중에는 신과의
만남이라는 초유의 체험이 있었고, 덕분에 나는 순식간에 감정의 앙금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나서서 장인, 장모님 모시고
여행을 가곤 한다. 이제는 적어도 욕먹을 짓 하는 사위는 아닌
셈이다.
지난 2주 동안은 아버지의 컴퓨터를 장만하느라 좀 분주했다.
아버지 연세가 칠십대 초반이셨을 때에는 컴퓨터 배우실 것을 권해드려도 손사래를
치시더니만, 어언 팔순을 바라보는 고령에 이르시더니 새삼
신기술을 습득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연세에 생소한 컴퓨터와 인터넷을
배우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들인
나와는 달리 기계와는 평생 담쌓으신 분 아닌가.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새로운
것을 배우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아주 기뻤다. 그래서 당장 수소문해서
노트북 컴퓨터 한 대를 주문한 다음, 그것을 받아서 셋팅하여 아버지 책상
위에다 올려놓고, 초고속 인터넷도 연결하고, 안철수 안티바이러스
프로그램도 깔아서,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 써핑이 가능하도록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해드렸다. 동네의 노인 컴퓨터 교실에도 몇 주째
출석하고 계신다지만, 여전히 컴퓨터를 켜고 끄는 것조차 어려워하신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다. 효도를 해서 기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여전히 삶에 대한 의욕을 품고 계시다는 사실에 내가 기뻐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 기분이 좋은 것이다. 오륙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사에
아버지와 충돌하며 아버지에 대한 격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이제는 그 증오심을 끄집어내지 않고도 아버지와 지낼 수가
있게 됐다. 나는 결코 효자는 못되고, 그저 천하의 불효자라고
세상의 지탄이나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보면 지금의 나는 나름대로
선하게 집안 어른들 모시며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들 다 차곡차곡 정돈해놓을 수 있음에 신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여전히 알뜰살뜰하게 어른들 마음 헤아려 공양하는 효성스러운
자식은 아닌 것이 사실이고, 또 딱히 그런 효자가 될 계획도 갖고 있지
않다. 스스로 평하건대,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 내가
지금 이런 꼬라지로 살고 있음에 불만이 없고, 평화롭다.
그러나
과거에는,
특히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지금처럼 평화롭지 못했다. 내게 '효심이 부족함'이
몹시 못마땅했다. 그건 '불효자는 웁니다'와 같은 반성이나 회한 때문이
아니었다.
신과의 만남을 체험하여 나의 최상에 대한 '언질'을 신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효심은 부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초심은 너무도 선명했기에, 형편없는 내 모습을
수용하기가 어려웠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평화롭게 수용한다. '나는 효자도 아니고, 불효자도 아니여'(딸내미들이
환장하는 '개그콘서트'의 '같기도' 버전)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효자이기도 하고, 불효자이기도
혀!'라고 표현하고 싶다.
오직 모든 이를 사랑하고,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이타심의 화신이어야만 한다고 믿었던 초심의 단계는
그 나름대로 가치있는 수행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것은, 형편없는 인간인 내가 영 변하지를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형편없는 나의 변화는 당시의 나의 기대와는 달리, 선명한 도덕성과 선함에 대한 집착에
의해 발동걸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형편없는 부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됐다.
나 자신의 형편없는 부분을 부인하고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형편없는
타인들도 용서할줄 아는 관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나는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기도 함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을 반성한다. 제가 뭐 그리 잘났다고, 스스로를 특별한 신의 은총을
받은 고결한 사랑의 화신 쯤 되는 것으로 믿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참이다: 나 또한 누구나 받는 신의 은총을 받은 고귀한 사랑의 도구이다.
겉보기에 아무리 형편없다 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