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2007/1/14)
©
Suk Hoon Han
나는
왜 늘상 바쁘게 살고 있는 건지 의아하다. 어떤 이들처럼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누구처럼 풍부한 연구성과를 내는 것도 아니며, 또는 존경스러운 훌륭한 분들처럼
중생 제도에 열심인 것도 아니면서 - '중생 제도'는커녕 제 몸뚱아리
하나 추스리는 데도 헤매는 주제에. 뭣 때문에 그리 바쁜지 따져볼 요량으로
이 나이에도 여전히 독신인 몇몇 벗들의 생활방식과 비교해보니,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것이 생활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할 일이 많아도
딸들을 소외시킬 정도로 일에 전념하지는 않는다. 일도 하고 살림도
도맡아 하는 아내도 도와줘야 한다. 혼자 계신 아버지도 찾아뵈야 한다.
처가도 살펴야 하고, 형제자매, 친지들과도 왕래해야 한다. 뭐, 이러다보니
대단한 사회생활도 없는 인간이면서도 늘 할 일은 참 많다. 그래서 늘상
바쁜가 보다.
지난 연말에는 치과 치료 덕분에 연말 모임도 안
가졌었고, 연초에는 독감으로 앓아누워서 꼼짝도 못했다. 그리고는
줄곳 일만 했다. 내 일에는 주말이 따로 없기 때문에, 하루도 쉬지
않고 한두 달 넘도록 계속 일하게 되는 게 상례다. 시간에 늘 쫓기며
몸도 성치 않은 와중에 많은 일을 해왔던 때문인지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헌데 단 하루도 혼자만의 휴식을 위해서 쓸 여유가 없다.
명색이 프리랜서인 내가, 자유 직업인인 내가 하루를 온전히 나 자신에게
쓰지를 못한다. 정말 현대인의 생활방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또는,
나 자신이 현대문명의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을만큼
자신만만하지 못하던가. 끙끙 앓느라 꼼짝 못하고 있는데도, '일'이
시급하다며 이 몸뚱아리 일으켜 빨리 일해달라고 조르는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한 그들 모두 사랑하는 벗이자 동료들이지만, 이 문명
속에서는 정말 '사람'이 목적이 아니라 '일'이 목적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하여 하루를 온전히 못 낸다면, 단 몇 시간이라도
낼 수는 있어야지. 다행히도 마감 시간에 맞춰 모든 일들을 끝낸
어느 날, 집안 살림의 의무를 오전 중에 후딱 해치워 놓고 혼자 산에
올라갔다. 본격적으로 등산할 시간도 없어서 한 시간만 걷다 오기로
했다. 집 뒤의 관악산 등산로에는 언제나 등산객들이 많다. 저 수많은
사람들도 저렇게 하루 왼종일을 등산에 쓸 수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이지?
하는 부당한 불평은 금세 접어버린다: 지난 한 해만도 가족 데리고 여행을
몇 번이나 다녀왔는가 따져보면 불평할 처지가 못된다. 어쨌건 최근
몇 년 동안은 나 홀로 여행도 못 떠나봤다. 이러면 안되는데, 갈수록
더 훌훌 떨고 자유롭게 싸돌아다닐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원래
내 계획이었는데... 어쨌건 한 시간이라도 뒷산에 오를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 주 등산로에서 옆으로 비껴서 난 샛길로 접어들었다.
상대적으로 경사가 급한 샛길에는 등산객들이 많지 않아 좋다. 금세
사방이 조용해진다. 새소리가 들린다.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이십
여분만에 작은 동산 위 약수터까지 올랐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청명하기 그지없어서, 썬글라스를 끼고 창공을 응시하면 눈동자가 시리다.
조용하다. 문명의 소리를 이렇게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방법도 없으리라.
조용하다. 이곳까지 오기 전에는 웬만해선 바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고, 차디찬 겨울 공기의 어루만짐을 느낄 수 없다. 가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찬물 한 사발 들이키고 나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 그저 가만히
정지해 있어본다. 조용하다. 찬 바람에 온 몸이 씻겨지는 것만 같다.
평화롭다. 오랜만에 쉬어보는 것 같다. 휴식이란 이렇게 하는 것, 나도
알고는 있었다.
휴식의 목적은 자유로워지는 데 있다고 본다.
삶에 속박된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을 나는 주로 혼자
취해야 제대로 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저 각자의
개성일 따름이렸다. 혼자 제대로 휴식하면 자연스레 맑은 성찰이 마음
속으로 스며든다. 겨울 숲속에 가만히 서서 새소리를 들으며 찬바람을
가슴 속에 들이마시다 보면 맑은 성찰이 마음 속으로 함께 스며든다.
내가 왜 해탈 못하고 이러고 살고 있는지를 잘 알겠다. 그게 다 내 탓인
것을 잘 알겠다. 타인들에게 나의 최상의 사랑으로 다가갔던 위대한
순간들에 타인들로부터 잔인하게 거부당했던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 타인들은 내 삶의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고, 그들이 '최상의 나'를
그다지도 혹독하게 대했었다. 그 상처들을 아직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은, 내가 그들에게 엄청나게 혹독했었음이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나 자신의 상처만 어루만지며 엄살피우고
있는 것이거늘.
휴식하고 나니, 모든 게 투명하고 또렷해진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나라는 것을 명확히 알게 된다. 휴식은 그래서
평상시보다 더 또렷한 의식상태를 가져다 준다. 해방되고,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평화롭다. 소나무 군락 한 가운데에서 홀로 우뚝 솟아오른 상수리
나무 꼭대기가 서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던 겨울 태양의 은총을 한몸 가득
받고 있다. 눈부신 황금빛 은총. 상수리 나무가 부러웠다. 골짜기 비탈길로
내 몸을 옮겨 놓아본다. 내게도 그 황금빛 은총이 가득 내려쬔다. 이젠
상수리 나무도 부럽지 않다. 신의 은총을 온몸 가득 받았으니 부러울
것이 없다. 휴식의 은총을 듬뿍 받았으니 더 투덜거릴 건덕지도 없다.
합장하여 기도 올리고,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산길을 다시 내려간다.
물론
다시금 바빠질 것이다. 그러다 또 쉬면 된다. 언제나 내게 휴식의 은총은
주실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님께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