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점검

자기 점검 (2007/6/2)

나에겐 세상 만사에 대한 흑백의 구분이 없다. (거의) 모든 걸 정도의 차이로 본다. (거의) 모든 걸 연속선 상에서 0(零)이란 값보다 높거나 낮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본다. 거기엔 나 자신도 포함된다. 나의 모든 행위 역시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나의 행위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데, 매 순간에 양자의 가능성을 다 지니고 있다. 나의 행위가 선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선 그다지 긴장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의 그럴 가능성을 때때로 점검해보곤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가능성도 있다. 내가 무슨 잘나고 고귀한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든지 간에, 그것들이 죄다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경제적 욕구의 표출일 뿐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 딸들이 이 땅의 '오도된 교육열'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연친화적, 전인교육적 성장 환경을 조성하려 하면서 학습능력의 증진에도 신경써가며 키운다(많이 재우고, 많이 놀리지만, 책 읽기를 권장하고, 엄격하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는 둥). 이런 게 나의 교육적 이상을 구현함으로써 딸들이 보다 온전한 어른으로 성숙해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일이라고 좋게 말할 수도 있지만, 제 자식 잘되기 바라고 애쓰는 것은 실은 본능적인 일이다. 내 DNA를 물려받은 '내 새끼'들이 성공적으로 그것을 또 퍼뜨리도록 본능적으로 돕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나는 강의 준비를 열심히 하고, 성심껏 가르친다. 내 메시지가 학생들의 마음 밭에 씨앗을 뿌려서, 그네들이 나중에 선생이 되어 후대를 가르칠 때 그 메시지가 꽃을 피울 수 있기를 희망하며, 매번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기도를 통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준비시킨다. 대학 강의란 나에게는 영광스럽고도 성스러운 기회다. 이런 자세를 욕할 건 없겠지만, 이게 과연 다일까? 나는 젊은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에고를 버리고 메시지를 전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에고를 만족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말이다.

이 싸이트를 꾸준히 운영하는 건 또 어떤가? 다른 이들의 선한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해보고 싶은 욕구, 또는 의지가 분명히 있어서 시작한 싸이트지만, 사회적 소통에 대한 내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는 아닌가? '소통'의 욕구는 남성 방문객에게는 우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론 나의 영향력 증대를 수반하지는 않는가? 내가 그걸 원했던 경우는 없었는가 말이다. 또한 여성 방문객과도 우정을 나누고, 어쩌면 영향력 증대를 꾀했는지도 모르지만, 그 외에도 내 무의식적 리비도의 음험한 조종도 깔려있지는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이 싸이트 개장 때부터 단골로 방문해오고 있는 내 죽마고우 녀석이, 나와 여성 독자들 간의 교류가 증가할 경우, JMS 교주 정명석처럼 놀아나는 신흥 쎅스교 교주가 탄생하는 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내 세대에게는 어느덧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70년대의 '선데이 서울(옐로우 저널리즘의 대표 주자)'을 떠올리게 해주는 흥미로운 발상이었고, 나는 벗의 창의적 회상력을 이렇게 칭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웬수같은 놈, 썬데이 서울 기사 쓰고 자빠졌어!"

사실, 나의 지극히 개인주의적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신과 나와의 관계의 에쎈스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짙푸른 열정의 발현이라고 나 스스로 믿고 있지만, 그것이 순전히 신앙과 영성의 추구인지, 아니면 '나는 특별해'라는 내 천박한 에고의 자기만족적 놀음질인지 백프로 확신할 수 있는가? 또한 나의 영성 추구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듯 싶은 근본주의적 개신교에 대한 나의 비판은 오로지 영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앞서, 혹시 나의 심리적 그림자의 투사에 불과할 가능성은 없는가? 내가 싫어하는 것이 나를 말해준다는 심리학적 경구를 따를 때, 내가 싫어하는 나의 많은 부분들을 내가 개신교의 행동거지에 투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이런 '자기 점검'의 체크리스트는 실은 굉장히 길다. 노장의 무위자연을 읊조리면서 나는 나의 나태함을 숨기려 하는 건 아닌가? 쓸데 없는 일은 안 하겠노라면서 '무위'를 내세우는 것이 사실은 어떤 골치아픈 일거리도 귀찮아하는 나의 비겁함의 소치는 아닌가? 내가 제 좋은 일들만 하며 살겠노라며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집안 넉넉해서 외국 유학 다녀오고, 아파트까지 물려받은 늘어진 팔자 덕분이 아닌가? 아니, 그 늘어진 팔자 덕분에 직업적 자유를 누리고 제 멋대로 살며,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영성을 추구한다며 제 잘난 척하는 맛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결국, 에드워드 윌슨이 말하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프로이드가 설명해준 리비도에 끌려다니는 인간, 마르크스가 알려준 사회경제적 관계의 산물로서의 인간, 이런 것들이 다 지금의 나를 설명해줄 수 있지 않은가? 그밖에 다른 설명의 여지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영성이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이것이 나의 '자기 점검'의 핵심 질문이다. (물론 이런 회의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매슬로우의 욕구계층이론의 상위 욕구인 자기실현 욕구란 것도 실은 육체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자아보존 욕구를 숨기고 있는 겉치장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마르크스 식으로 보면 모든 게 사회경제적 추구로 보이고, 프로이드 식으로 보면 죄다 무의식적 성욕의 표출로 보이기 마련이니까.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점을 인정하고 자기 점검을 해봐야겠다.)

나는 앞서 말한 모든 악과 어둠의 가능성이 내 안에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 안에 있어도 내가 모를 수 있다. 내가 없다고 여겨도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는 이성의 결론이다. 나는 인간성이라는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선할 수도, 지극히 사악할 수도 있는 잠재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드넓은 나라는 존재의 스펙트럼으로부터 나의 어떤 측면을 끄집어내느냐, 드러내느냐, 발휘하느냐가 항상 나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안의 신을 드러내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내 안의 악마도 드러내 봤다. 그래서 결코 장담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기도할 뿐이다.

나의 행위가 어느 한 쪽으로 (예를 들어서 선한 쪽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나와 신과의 관계에 달려있다. 그런데 나는 항상 신과의 관계를 의식하고 있지도 못할 뿐더러, 신과의 관계를 의식하면서도 신성을 지금 이 순간의 나라는 구체성을 통해서 드러내는 데 형편없이 실패했던 경우도 많다. 따라서 내가 선·악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아슬아슬한 일이다. 일상이 아슬아슬하다. 매일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매일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사는 지금의 상태가 그것을 아예 모르고 사는 상태보다는 훨씬 낫다. 왜냐하면 최소한 지금의 상태가 해방의 가능성을 향하여 훨씬 열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해방을 해탈이라 부르는가보다. 나는 시간이 없는 본질의 차원에서 내가 이미 해탈해있음을 믿는다. 지금은 내가 시간이 있는 차원에서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꿰어있는 운명의 줄기를 밟아가며 해탈한 나에게로 향해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진정한 나에게로 다가가고 있는 길 위에 있음을 알기 때문에 '나'를 두려워만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평화로울 수도 있다.

내가 유전자에 새겨진 명령을 이행하고 있건 말건 간에, 내 딸들을 전인교육적 이상을 따라서 키우는 것이 비효과적인 자식 양육법이라고는 판단하지 않는다, 교육학자로서. 내가 나의 학생들에게 의도했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나는 학생들로부터 존경도 받아봤고 수모도 당해봤다. 그저 소명으로 주어진 길을 내 방식대로 갈 뿐이다. 'I did it My Way ~♪' 내가 '신앙수행 싸이트'를 통해서 사회적 명망이나, 인간관계 형성을 증진하는 소통, 또는 심지어 이성교제(십대들에게나 쓰는 용어일 듯...)를 획책하고 있다고는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것들을 다 무의식적으로 획책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저, 그런 것들을 획책할 뿐만 아니라 실천하기까지도 하는 사회악적인 인간들과 내가 인류학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이성적 판단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매 순간 정성을 다해서 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계속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십사고 신께 기도할 따름이다.

어쩌면, 이런 끝없는 아슬아슬함, 끝없는 선택의 노정, 끝없는 고통과 해소 등등이 안겨주는 피로함 때문에 해탈을 원하게 될 때, 일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해탈을 원하게 될 때, 해탈은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 자신이 끝없는 선택을 요청하는 수행의 길을 감사의 미소로써 끌어안을 수 있을 때, 그런 흔치 않은 순간에는, 매슬로우의 욕구계층이론의 위계가 물구나무서기를 한다. 즉, 타인의 육체적, 물질주의적, 사회경제적 추구도 다 자기실현적 욕구의 그림자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는 애초에 영적 존재이며, 신성과 불성을 품고 있는 존재이지만, 단지 그것을 잊고 온갖 현세의 일에 빠져있을 따름이란 말이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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