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2007/3/31)
©
Suk Hoon Han
오후에
안양 쪽에서 관악산을 올랐다. 산중턱쯤 오르니 빗방울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모자를 눌러썼다. 오랜만에 암벽이 많은 능선을 탔는데 비가
와서 바위가 미끄럽다보니, 아슬아슬한 곳에서는 좀 무서웠다. 어쨌든
차거운 비바람을 헤치고 험한 능선 길을 지나 연주사에 도착했다. 그때부터
날이 차츰 개이기 시작했다. 연주사에서 과천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그날따라 인적이 없었다. 고요했다.
비구름도 걷힌 초저녁 무렵,
따사로운 햇빛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산길을 천천히 걸어내려갔다. 비온
뒤라 계곡에 물이 풍부했다. 물소리 듣느라 아무 생각없이 걷다가, 고요하고도
그윽한 계곡 옆에 서서 한참 동안 주변을 완상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등산객도 없이 고요해진 관악산을 걷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평화로움이 깃들었다.
하산길을 더 가다보니
봄꽃 핀 나무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산수유도 있고 진달래도 있었다.
길가에 핀 산수유 곁에 가만히 서보았다. 내 입에서 찬탄의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너 정말로 아름답구나!" 꽃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사랑스러웠다. 이러한 꽃을 창조하신 신은 자비로운 분이 아닐 수 없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가슴 속으로 꽃의 아름다움을 스며들게 해주신
신께 감사드렸다. 갈수록 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은 늙어가는 증거라고
하던데...
여전히 고요한 하산길, 마주치는 이도 없이 줄곳 혼자
내려가다가 이번에는 온몸 가득히 여린 새이파리가 돋아난 크지 않은
한 그루 나무와 마주쳤다. 아아, 연두빛 어린 이파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키가 3미터도 안될 그 젊은 나무 앞에 선 나는 계속 감탄의 한숨만 내뱉고
있었다. 자연은 이렇게도 아름답구나. 엊그제 전라북도로 여행 다녀오다
진안읍내의 고즈넉한 냇가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쉴 때 둘째 나나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아빠, 난 자연이 좋아. 시골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애. 차도 별로 없고, 공기도 좋고, 나무도 많고, 냇물이 흐르는
시골이 좋아."
초등1학년 짜리 딸애의 마음을 떠올려본
그 순간, 약 사십 년 전 바로 고만했던 나의 동심이 떠올랐다. 훗날,
어른이 돼서 찾아가봤을 때엔 터무니없이 비좁은 모습에 깜짝 놀랐던
어린 시절의 집. 노량진 언덕의 내 유아기 때 집 뜰에는 서너 살
적에는 거대하게 느껴졌던 무궁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는 그 나무 밑둥에 앉아 영원토록 흙장난을 하고 놀았다. 화창하게
햇살 쬐는 날에는 그 나뭇 그늘 아래의 시원함이 정말 상쾌했고, 다
피고 떨어진 꽃잎들의 촉감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그 나무를
사랑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을 기억해낼 수 있다. 이사를 가느라 무궁화
나무를 떠났을 때, 어린 아이로서는 표현할 수 없었던 이별의 슬픔이
있었음을 기억해낼 수 있다.
내가 아홉, 열살이나 먹었을
무렵, 자그마했지만 여러 종류의 나무와 화초가 심어져 있던 두 번째
집의 마당도 떠올랐다. 라일락 나뭇잎 사이의 서늘한 그늘과 채송화와
백일홍, 포도나무 넝쿨과 은행나무들, 그것들 곁에서 그것들을 느끼고
바라보던 어린 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뜰의 나무와 꽃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끼고 있었을까?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무와 꽃들로부터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감상을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아서, 깊이 집중하면 희미하게나마 다시금 그것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그것은 신비함, 경이로움, 외로움, 쓸쓸함, 그리움, 그리고
온갖 상상 등이 한데 섞여있는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이었다. 아마도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했던가 보다. 유아적 그리움을 오이디푸스적 성장기의
시각에서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 그리움이 어린 내 마음을 미세하게
아프게 했고, 동시에 내 가슴을 설레게도 했음을 다른 시각으로
관찰해보고 싶다. 짧았던 그 당시 수삼년의 감수성은 사춘기에 접어들며
사라져버렸다. 아니, 의도적으로 억압됐다. 세상과 나 자신이 그
따위 감수성은 무가치한 것이라 결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게
주어진 감수성이라는 선물을 스스로 차버리고 없애려 했음은 어찌보면
비극이겠으나, 그것이 제거되는 것도 아닐 테고 수십 년이 지나도 다시
기억되는 것임을 깨달은 지금, 그것을 뒤늦게라도 되살려내는 일에도
심오한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막상 이런 생각에 이르자
기뻤다. 내 안에는 여전히 끄집어내서 가공하지 않은 천연자원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된 것과도 같다고나 할까.
신의 사랑에 대하여 명상하는
일상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온 것만 같다. 나는 신의 자비를 구해왔다.
기복성 희구가 아니라, 신을 늘 느끼고 경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신의 자비를 구해왔다. 신은 나를 산으로, 봄꽃들에게로,
그리고 연두빛 새이파리에게로 이끌어주셨다. 浩然之氣 - 자연을
느끼는 것은 내게 평화와 감사를 주었다. 그 과정에 기억해낸 원초적인
나의 감수성 속에서 이번 생에 부여받은 나의 개성의 본질을 힐끔
엿보았다. 그것이 그립고, 그것을 잃은 것이 애틋하고, 그것을 기억해낼
수 있음이 고맙다. 나무와 풀과 꽃을 바라보며 느꼈던 동심 속에 내
삶의 창조성의 원천이, 씨앗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싹이
움트게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싹을 움트게 해주는 것은 자비심이라
배웠다. 나는 사랑을 명상함으로써 그 싹에 자비심의 기운을 선사할
것이다.
나만의 감수성으로 치유와 성장에 관한 한 가지 소박한
방법을 일구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