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기

내 자식 가르치기 (2007/11/25)

내가 직접 큰 딸에게 컴퓨터다 영어다 가르친지도 2년 쯤 돼간다. 제 자식 가르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들 하는데, 나도 그 말에 수긍한다. 마누라한테 자동차 운전 가르치려면 이혼 서류에 도장 찍고 해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원체 대단히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난 내가 학교에서는 아주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존중하며, 지금껏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잘 가르쳤다고 받은 상들도 수두룩하다. 그런데도 내 자식을 가르치는 데 이르러서는 인간성의 한계가 드러나서, 친절과 존중의 정신 다 잊어버리고 성질내는 나쁜 선생이 되곤 한다. 하지만 아무튼 꾸준히 첫째를 가르쳐 왔다. 둘째는 옆에서 어깨너머로 배운다.

그럭저럭 지금껏 가르쳐온 것이 나름대로 학습성과도 보이고 있고, 더러운 성질도 꽤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여겼건만, 얼마 전에는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여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나는 아이에게 화를 냈고, 아이는 입이 잔뜩 튀어나와서 제 방으로 가버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딸에게 화내고 나면 후회 막급. 그날 밤 아이가 잠든 뒤에 다음과 같은 '아빠의 일기' 편지를 써서 프린터로 인쇄하여, 다음 날 아침 아이가 학교가기 전에 보여줬다:

오늘 오랜만에 시시에게 슈렉을 보며 영어를 가르쳤다. 중간에 "It's Friday"라는 매우 간단한 문장을 설명하고자 했다. 시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한 문장도 이해하고, Be 동사에 관한 문법도 전에 배웠다.

"‘It's’가 뭐야?"

"있다."

"‘It's’가 원래 뭐야?"

"있다."

"뜻이 아니라, ‘It's’가 뭐의 약자냐구."

"있다."

"(♨) 얘, ‘It's’의 뜻을 물어보는 게 아니고, ‘It's’가 뭐뭐의 약자냐구."

"몰라."

"‘It’는 뭐야?"

"있다."

"‘It’가 '있다'야?"

"응."

"(♨) 아빠가 좀 전에 물어봤었지? '있다', '이다', 이런 게 무슨 동사냐구."

"....."

"'있다'가 뭐야?"

"Are."

"또."

"Am."

"또."

"..... Be."

"또."

"....."

"'그가 있다' 할 때의 '있다'가 뭐야?"

"..... Is."

"그래, 'am, are, is' 이런 것들이 다 be 동사라구, 제일 중요하고 기초적인 거라고 그랬잖아, 문법이라곤 이거 딱 하나 배웠고, 이거 머리 속에 박아놓으라고 아빠가 몇 번을 말했어? be 동사, 이거 하나 못 기억해? (♨) 다시 아까 꺼로 돌아가서, ‘It's’가 뭐의 약자야?"

"있다."

"(♨ 부글부글) '있다'는 방금 뭐라고 그랬지?"

"be"

"그래, 그런데 어떻게 ‘It's’가 '있다'야? ‘is’가 '있다'지. (♨ 부글부글) ‘It's’ 는 뭐야?"

"몰라."

"‘It is’ 가 뭔지 몰라?"

"....."

"it 는 뭐야?"

"있다."

"(♨부글부글부글♨) '있다'는 뭐랬지?"

"am."

"'It'가 '있다'야?"

"몰라."

"'It'가 뭔지 몰라? 'It'가?"

"....."

"'It's, It is'가 뭐야?"

"있다."

"됐어, 그만 둬, 그만 해, 너 지금 아빠 놀리니? 아빠 덷고 놀아? 관두고 들어가서 잠이나 자! (씩씩)"

시시는 그렇게도 피곤했을까? 학교 갔다가 밤에 들어오니 나도 피곤하다. 영어를 잘 가르치고 싶은데 아이가 저렇게 나오니 참 힘들다. 딸한테 영어도 하나 제대로 못 가르치고, 나는 부끄러운 아빠다. 빨리 슈렉을 마치고 영문법도 마치고 함께 해리 포터 영어로 읽고 싶은데, 잘 안된다.

딸내미는 이 편지를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애비와 화해하고 학교 가서 다행이다. '소프라노스'라는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를 잠간 봤는데, 주인공에게 상담해주는 심리학자 왈,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부모 역할을 할 자질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말을 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성찰해보니, 자신의 어머니가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주인공은 심리학자에게 마구 화를 낸다. 그런데 주인공이 떠올려본 과거의 어머니 모습이 나의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했다. 혹시 내 어머니도 부모 자질이 부족한 종류의 사람이었을까? 이런 불효막심한 의문을 제기함으로 인하여 내가 드라마 주인공처럼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내 어머니가 그 주인공의 어머니처럼 차갑고 정이 없으셨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바로 그점 때문에 내가 내 자식들과는 유치하게 까불고 장난치며 놀고 신체접촉을 많이 하는 둥, 정을 듬뿍 퍼부으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초등1학년인 둘째는 요즘도 걸핏하면 내등에 업힌다. 제발 내딸들은 자라서 애비가 자신을 얼마나 많이 안아줬는가만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애비가 얼마나 많이 성질내고 야단쳤는가가 아니라. 자식이 제일 무섭다.

이제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큰 애의 관심은 이미 친구와 연예인 쪽으로 옮겨갔고, 그러니 아마도 걔는 2, 3년 안에 아빠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내가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서 해낼 수 있는 최고의 사명은 아이가 내 품을 떠난 뒤에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준비는, 영어 실력의 업그레이드 보다도 자신의 고귀한 본질을 믿는 마음을 가꾸는 일이라 하겠다. 그깟 영문법 잘 몰라도 좋으니 진정한 자신을 믿고 신나는 자세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에게 화내고 아이를 나무라는 나 자신의 모순성은 때로 좌절스럽기까지 하다. 나도 혹시 부모 자질이 부족한 종류의 사람은 아닐까?

하여간 용기를 내서 계속 딸에게 영어를 가르칠 것이다. 큰 애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애비와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것 같다 - 겨울방학에는 아빠 연구실에서 함께 책을 쓰자는 계획도 하고 있으니. 요즘들어 학생들에게 1:1 상담을 해준 일이 빈번한데, 나는 삶에 대한 고민 거리로 내게 조언을 청하는 이십대 학생들의 얼굴에서 내 딸의 얼굴을 본다. 내 딸들도 커서 저런 고민들을 하며 성숙해가겠지... 학생들을 대할 때만큼 내 딸을 대할 때도 친절과 존중의 정신으로 가르쳐야 할 텐데... 아빠와 공부해서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아빠와 아주 좋은 관계를 형성한 여성으로 커가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다. 그런 데에서부터 자신의 진면목에 대한 믿음이 커가니까 말이다. 자꾸 똑같은 말 반복해서 쓰는 이유는 자꾸 그걸 내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론만 밝고 실력은 참 딸리는 애비다.

'수행일상 2007'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