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정(情) (2008/7/22)

나는 질펀한 인간적인 정내미가 부족하다는 말을 곧잘 들어왔다. 사람들이 나를 냉정하다고 여기는 것이 억울하다. 난 그저 개인주의적인 인간일 따름인데, 거기에다가 나름의 이기심이 조금 가미된 탓에 - 세상에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 무리를 지어 어울리는 걸 적극적으로 즐기지 않을 뿐, 정이 메마른 인간은 아니라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워낙 타고난 꼴이 혼자 조용히 제 할 일이나 하며 지내기를 좋아하는 인간들이 있는 법, 나의 그런 타고난 성향 때문에 세상의 비난을 받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아마도 내가 개인 플레이를 지향한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냉정한 인간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실은, 난 인간관계의 유지를 위한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친구건, 지인이건, 난 평소에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다. 메일도 안보낸다. 특별한 안건이 있기 전에는. 나의 이런 스타일을 잘 아는 오랜 지기들은 이제 더 이상 불평도 하지 않는다 - '포기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안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이들은 나를 정내미 없는 인간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사람들한테 곰살맞게 연락하고 챙겨주지도 않는 인간이 사람들에 의해 냉정하게 여겨지는 것이 불만이라면, 그런 불만 자체가 부당하리라.

하지만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나도 다 그럴 만 한 연유가 있기에 개인 플레이를 견지하며 살고 있기도 하다. 내가 선택한 평생의 갈 길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 조용하게 있어야 할 필요가 빈번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너무 사회 활동에 휩쓸려 회전도 느린 두뇌를 과도하게 쓰며 시간을 보내다보면 나는 얼이 빠져 버려서 애초에 하고 있던 본업에 대해 손을 놔버리게 된다. 이건 순전히 변명일 수 있지만,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개인 플레이어인 것과 내가 혼자 고독을 유지해야만 하는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것, 양자 사이에는 유기적이고 쌍무적인 보완관계가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변명을 주절거려보지만, 여전히 께름칙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연락을 잘 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법도 없고, 또 누군가를 찾아나서는 일도 거의 없다는 점, 바로 그 자체가 나의 무정함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하는 한 줄기 의구심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자신의 무정함, 또는 냉정함에 대해 구태여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유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한국적인' 정(情)의 가치에 관해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서구화됐었던 젊은 시절에는 한국적인 정의 강조를 온정주의적 타락의 원천 쯤으로 간주했었건만, 그런 메마르고 차가운 젊은 시절의 성정에 심각한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나이먹으며 새삼 깨닫고 있다. 물론 개인적 의리와 인정 때문에 공과 사를 구분 못한 나머지, 장기적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우리 사이'를 위해서는 이득을 줄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은 '정'을 중시하는 태도의 어두운 측면이다. 허나 정이 어두운 면만 갖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유교적 가치의 최상부를 점하고 있는 인(仁)이 구체적으로 인간사에 드러나는 양상이 '측은지심'일진대, 타인의 아픔과 느낌에 공감하여 사랑의 손길을 뻗는 이러한 마음 씀씀이야 말로 한국인의 '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바로 동서고금을 통해 성현과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설파해온 인간의 본성이고, 신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주 '책의 지혜' 쎅션에 올린 인요한 선생의 '정' 예찬론이 심각하게 내 정신을 울린다. 그래서 내가 정 많은 인간이 못되는 것 같다는 일련의 관찰이 우려스러운 것이다. 내가 미친 놈처럼 신의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든 되살려서 세상에 전하려는 일을 소명으로 삼고 노력하고 있다고 치자.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놈의 마음속에 사랑이 쬐금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정'이란 척도를 놓고 봐도,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다. 내 큰 딸 시시는 정이 아주 많고 타인에게 감정이입도 자동적으로 되는 타입인데 비해 - 타인의 상처를 보면 자기가 운다 -, 둘째 나나는 냉정하고 타인에 대한 동정심도 잘 보여주지 않는다 - 타인의 상처에 소금도 뿌린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 이렇다 하여 한 아이는 정이 많아 신적 본성을 잘 드러내는 아이고, 다른 아이는 정이 적어 신적 본성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나온 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애비로서 그렇게 보아지지는 않는다. 둘째도 때와 경우에 따라 진한 정을 표출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정이란 사람들 하나 하나 속에 동일하게 내재돼있는 것이고, 그것이 드러나는 방식이 개성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 나의 주관적 견해다. 내 경우에도, 비록 가까운 친구나 선후배들을 알뜰하게 챙기는 법이 없지만, 내 학생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를 갖다 바치는 편이다. 물론 이렇게 학생들에게 쏟는 나의 정이라는 게 따스하고 애정어린 말이나 눈빛 같은 것으로 드러나는 일은 별로 없다고 본다; 내가 그들을 위해 준비하는 수업내용, 그들에게 전해주는 글 등을 통해서 드러난다. 난 어쩔 수 없이 - 겉으로는 - 냉정해보일 수밖에 없는 스타일을 타고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뭣이 어찌 됐든 간에, 난 정이 무지하게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를 패거리지어 다른 무리로부터 분리시키는 배타적인 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따스하게 감싸서 하나를 지향하게 도와줄 그런 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그런 정을 가꾸는 일을 점점 더 경시하고 무시하게 되는 이 현실을 경계함이 옳다. 무정한 인간이 '정'을 외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그렇게 무정하거나 냉정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여생을 만들고 싶다.

'수행일상 2008'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