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변 (2008/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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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k Hoon Han
몸이
안좋아 주말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마침 식구들은 저마다 행사가
있어 다들 밖으로 돌았다. 일하기도 쉽지 않고 하여 혼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영문판 신약 성경을 꺼내서 읽었다. 10년 전에 신비 체험 한 직후에
시카고 대학 신학대학 서점에서 산 것이다. 이따금씩 그 책을 펼쳐보곤
한다. 이날은 일련의 구절들이 연결된 의미로 떠올라 나의 의식을 자극했다.
'되돌아
온 악령(마태 12:43)'의 비유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끈질긴 악습을
끊어서 자신을 한 번 정화한 사람이 정화된 자신의 내면에 자만하여
수행의 끈을 놓고는 단정하고도 체계적으로 정돈된 내면을 유지하고
있을 때, 바로 그런 방심의 순간에 구악은 더 큰 세력을 이끌고 되돌아와서
이전 보다 훨씬 심하게 그 사람을 망쳐버린다는 예화로 읽었다. 내가
처절하게 겪었던 바이다. 그 이후로는 좀체로 방심하지 않는다. 이른바
영적 자만의 헛됨을 가슴에 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루가 13:6)'가 가슴속에 울림을 만들었다.
신께서 '친히' 그 영적 성장을 위한 씨를 심어주었지만 세월이 흘러도
올곧게 자라나지 못하는 부실한 신앙의 나무가 바로 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 같다는 부끄러움이 일었다. 열매를 맺기는커녕 제대로 자라지도
않고 있다면 나라는 신앙의 나무는, 나의 영성은 뿌리뽑혀서 버려질
가치밖에 없는 것일까? 허나 열매가 열을 낸다고 열리는 것도 아닌 것을,
굴복하고 좌절하지 말고 꾸준히 내 길을 갈 도리밖에... 뽑혀지게 되든
말든 오늘 내 할 일은 할 밖에. 내일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오늘 심을
사과나무는 심을 밖에.
세 번째로 나를 붙잡은 것은 '맛 잃은
소금(루가 14:34)'이라는 비유의 신랄함이었다.
"소금은
좋은 물건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땅에도 소용없고 거름으로도 쓸 수 없어 내버릴 수밖에 없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내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세상에 제공할 유익한 것이 없을 때, 나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존재란 말이다. 나는 농사를 지을 줄도, 물건을 만들
줄도, 공사판 노동을 할 줄도 모른다. 입만 살아서 도무지 쓸모가 없는
인간일 따름이다. 물론 노자의 무용지용과 무위자연의 가르침을 따르자면, 자신의
쓸모를 억지로 만들려는 것은 헛되고 헛된 욕심일 뿐이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인정을 받아보려는 욕심에, 대중의
감상과 군중심리나 자극하는 집회를 열고, 쓸데없는 심리적 오락
장치들이나 고안하고, 그래서 자신의 메시지의 청자의 숫자나 더
늘이는 따위의 일은 소금의 짠 맛을 되살리는 것과 아무 상관 없는
행위겠다. 결국 짠 맛의 회복이란 행위가 아니라 그저 나로서 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
네 번째는 '금화의 비유(마태
25:14).' 신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성실히 키워서 세상에 유익한 결실을
맺기는커녕, 주어진 달란트를 묵히고 썩혀서 인생을 낭비한 인간의 비참한
결말을 경고하고 있다. 이 비유를 읽고, 자문했다. 나는 신께서 맡기신
금화를 불렸느냐? 한 푼도 못 불렸느냐? 오히려 잃진 않았느냐? 이렇게
솟아오른 질문 앞에 나는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초 만에, 의도하지도 않았고 마치 내 의지에 의해 촉발되지도
않은 것과 같은 외마디가 내 목구멍 저 아래로부터 치밀어 올랐다.
"No!"
나는
왜 그렇게 외쳤을까? 나는 지난 십 년간 내 달란트를 사장하고, 내 소명을
외면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노라고 나 자신 앞에서 당당히 항변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만큼 뻔뻔하지는 못한데... 오기와 똥고집이었을까?
혹시 진짜로 내게 맡겨진 금화를 아주 조금이나마 불려왔었던 것일까?
이런
것을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다. 나의 내장 속으로부터는
'No'라는 항변이 뛰쳐나오건만, 의식하는 '나'는 그 항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것은 의식하는 '나' 즉, 나의 피상적
에고가 지난 십여 년의 나의 삶을 실패로 규정하려 하기 때문이리라.
왜냐하면, 나는 내가 속한 직업군의 거의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실적'
축적과 '자리' 확보를 철저하게 외면해왔고, 그래서 당연하게도 실적과
자리가 제공하는 명예와 재화 획득에 철저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니, 명예와 재화 획득을 아예 시도도 하지 않았으니 실패했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세상에 보란 듯이 내세울 것도 없고
생활비 확보를 위해 헐떡여야 하는 처지가 됐는데, 나 자신이야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꼴통이라 치더라도, 내 처자식들은 이같은 '가장'의
미흡함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던가
보다.
게다가 신께서 밝혀주셨던 내 달란트를 키우고자 '소명'을
추구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결실을 가져다주는
종류의 일도 아니다. 한마디로 현실적 보상이 없는 종류의 일이다. 가시적인
것에 의존하는 습성을 지닌 나의 피상적 에고는 그래서 경전을
읽다가 고개를 떨궜던 것이리라; 손에 쥘 수 있는 아무런 결실이 없으므로. 에고는
그렇게 유치한 자기연민에 기대기를 좋아한다.
최근에 좀 무리한
탓에 몸이 안좋다보니 '나'의 낮은 부분이 도드라져 나온다. 그게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내 안에는 'No'라고 외치는 깡다구 좋은 놈도 버티고
앉아 있다. 그놈이 신의 메시지를 포착하는 놈이다. 따라서 '그놈'이라
불러서는 안된다. 시절이 하수상하고 민심은 흉흉하건만, 나는 여전히
처자식 먹여 살리며 따뜻한 내집에서 오손도손 잘 살고 있으니 이번
생에 복을 타고 난 팔자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때때로 내 마음에 자조감이
스며들도록 허용하는 것은 살아오며 형성된 나의 비열함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허상에 흔들리는 에고의 가벼움 때문이다.
그 비열한 녀석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오늘도 푸른 하늘이 고맙고 그래서 행복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