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1) (2008/4/17)
©
Sukhoon Han
내가 귀하게 여기는 물건 중에 자전거가 있다. 우리집 식구 각각은 자신의 자전거를 보유했다. 지금은 안타고 놓아두고 있지만 제일 큰 '준산악용' 내 자전거, 아담하고 바퀴도 작은 아내의 자전거, 첫째 딸의 아동용 자전거, 그리고 첫째가 타던 것을 둘째 딸이 물려받은, 보조 바퀴 두 개를 뗀 유아용 자전거가 그것들이다. 그것들의 보수, 유지, 관리는 내몫이다. 해마다 날씨가 좋은 시절에는 온 가족이 그것들을 타고 가까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간다 - 둘째 딸이 아직 잘 타지 못해서 나는 고 녀석의 자전거 뒤를 잡아주고 뛰어야 하지만.
작년 봄에 내 자전거와 첫째의 아동용 자전거를 도난당했다. 그때만 해도 열나게 자전거를 타던 때여서 낭패감이 컸다. 즉시 자전거를 찾아 나섰다. 부근의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범인임에 틀림없다는 심증이 있어, 학교 앞의 자전거 보관소로 가봤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내 자전거를 찾았다. 먼 발치에서도 그것이 내 자전거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 평범한 삼천리 자전거임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보니, 내 자물쇠를 부수고 훔쳐갔던 도둑이 제 자물쇠를 새로 달아서 장물을 보관해두고 있었다. 이 어린 도둑놈을 잠복하고 있다 잡아서 경찰에 넘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난 워낙 그런 걸 귀찮아 하는 인간이다. 집에 가서 절단도구를 가져와서 자물쇠를 부숴 자전거를 회수하고, 자전거가 서있던 자리에 파괴된 자물쇠와 함께 한 마디 경고문만 붙여놓고 왔다: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남의 물건 도둑질이나 하면 커서 뭐가 되겠니, 한 번 더 그랬다가 잡히면 그때는 경찰부른다. - 1단지 아저씨'
즉시 되찾은 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뺑뺑 돌며 이번에는 딸의 자전거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채 한 시간도 안돼서 길가에 쓰러져있는 아이 자전거를 발견했다. 어렵지 않게 되찾았지만 욕만 나왔다. 이튿날 나는 강력한 쇠사슬 자물쇠 두 개를 만원씩 주고 사서, 자전거 두 대씩 동여매놓았다. 트럭에 싣고 훔쳐가기 전에는 사슬에 얽힌 자전거 두 대를 사람이 들고 갈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무릎에 병이 생겨 자전거를 안타고 그냥 방치해뒀다. 그 좋아하던 자전거를 못 타는 것이 속이 상해 자전거 세워둔 곳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 내가 얼마나 자전거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오랫동안 안 타고 놔둔 자신의 자전거를 정비해 달라고 요청하여 할 수없이 자전거한테 가보니, 이번에는 아내의 자전거의 앞 바퀴만 어느 놈이 빼가버린 것이었다. 십 년은 된 낡은 자전거를 회생시키려고 몇 만원 주고 새 바퀴를 사다 달아주느니 아예 새 자전거를 사는 게 낫겠다 싶어, 폐품이 된 자전거는 그냥 그대로 세워두기로 했다. 새 자전거가 절실한 것도 아니어서, 그 이후로 아내도 자전거를 잊고 살게 됐다. 앞바퀴 없는 아내의 자전거는 둘째 딸의 유아용 자전거와 사슬로 함께 묶어뒀다.
겨울 내내 자전거 근처에도 안갔고, 다시 봄이 와서 애들 자전거를 정비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만에 자전거 보관대에 가보니 한데 묶어놓은 바퀴빠진 아내 자전거와 유아용 자전거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이 동네가 도둑놈들 소굴인 것이냐, 탄식이 흘러나왔다. 강력한 쇠사슬로 함께 동여매 놨는데, 그 두 대를 번쩍 들어 가져가버리다니, 힘으로써 지키려 애쓴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 무사히 서있는 내 자전거와 첫째 딸 자전거도 손대기가 싫어졌고, 그래서 그대로 그냥 세워두기만 했다.
그리고는 도둑질 못 해가게 아예 집안에 보관할 수 있는 가벼운 접이식 자전거나 새로 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헌데 좀 알아보니, 쓸 만한 그런 자전거들은 꽤 값이 비쌌다. 그럴 즈음 문득 언젠가 아파트 관리사무소 곁 공터에 고물 자전거들이 쌓여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곳으로 가봤더니, 거기에 바퀴빠진 아내 자전거와 둘째 딸의 분홍색 유아용 자전거도 얌전히 서있었다. 강력한 쇠사슬은 여전히 두 대를 묶고 있었다. 관리소 측에서 주인을 알 수 없는 그것들을 어디선가 수거해온 게다. 헌데 관리소 얘기인 즉슨, 바로 내일 그 자전거들을 완전히 폐기처분하기로 돼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라지기 직전에 아이의 자전거를 회수해왔다. 아내 것은 그냥 버리기로 했다. 딸내미 자전거는 회수하고자 별 노력도 안했건만 결국엔 다시 내 수중으로 돌아온 셈이다.
미국에서 귀국하기 직전까지 쓰던 싸구려 자전거 생각이 났다. 너무 후져서 보관하고 싶은 마음도 없기도 했지만, 박사논문 변론도 끝나고 귀국준비도 다 끝났을 즈음, 기숙사 앞에 묶어둔 그 자전거의 앞 바퀴만 도난당했었다. 나는 귀국하기 전날에 그 자전거의 자물쇠를 끌러서 그 자리에 놓아둔 채로 떠났다. 보나마나 그 동네의 가난한 흑인 아이들이 바퀴만 빼갔을 터, 나머지 자전거 몸체도 가져가서 함께 붙여서 쓰라고 주고 왔다. 그 자전거와 동고동락할 만큼 했다고 판단하여 놓아줬다.
삶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쇠사슬로 묶어두려던 것들도 잃게 되고, 포기하고 버리려 마음 먹었던 것들이 되돌아오기도 하는 인연. 어떤 관계를 인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계가 진행되고 있는 당시에는 알 수 없는 일, 오로지 관계가 지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뿐이 아니겠는가. 간혹, 이 인연이 놓아줘야 할 때에 이르렀음을 어렴풋이 깨닫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 간의 관계가 그러하다. 붙들고 지키려 한 사람이 떨어져나가는가 하면, 무념무상으로 대한 이가 오랫도록 남아 있기도 하듯이. 그 인연의 길이, 크기, 무게를 알면 좋겠으나 사람이 결코 미리 알 수 없고, 오로지 지나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뿐.
인연이란 것들이 모여서 삶의 여정의 주된 물결을 형성한다 할 때, 삶이란 어찌됐든 살아야만 하는 그 무엇일 뿐, 미리 알 수도, 계획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슬프고, 아프고, 괴로워도 그저 감내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 즐겁고, 기쁘고, 행복할 때 충분히 끌어안고 감사하며 살아봐야 하는 것. 그런 것이 아닐런지. 웬델 베리가 이렇게 말했듯이: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윤회는 신비의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어서 거론치 않기로 하지만, 윤회가 있던 없던 간에 인연은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원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연을 받아들이는 가장 유용한 태도는 감사일 것이다. 나는 바퀴가 빠져서 버리게 된 자전거와의 이별을 애도하고, 나머지 세 대의 정든 자전거들이 내 곁에 남아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다시 몸을 일으켜 내 소명을 좇아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