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

전인적(全人的) 성장 (2008/8/12)

예수님 닮은 완벽성을 배우리라 다짐하고 출발한 수행의 길, 그러나 '완벽'은 가까워지기는커녕, 세월이 갈수록 나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슬프지 않은 이유는, 완벽에 대한 강박을 떨쳐 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완벽'이 아닌 '온전'을 구해왔다. 나의 모든 부분을 모두 온전하게 드러내고 다스릴 수 있는 삶을 구해왔다. 나의 모든 부분에는 선과 빛과 신의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과 어둠과 비천함도 포함된다. 후자들을 드러낸다는 게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런 후자들을 억제하기보다는 인정해주고, 그것들이 각각의 마땅한 삶속의 위치에 얌전히 머물러 있도록 조치해준다고 해야 하겠다. 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이 문명에 의해 규정된 '완벽'이라는 우상만을 지향해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족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착한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제 이기심도 충족시켜줘야 한다. 돈도 벌어서 밥도 먹고 놀 때 놀기도 해야 한다. 다만 이기심이 타인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부단히 자신을 관찰하여 이기심을 승화시킬 방도를 찾는 게 좋겠다. 사람이 거룩할 수만은 없다. 거룩을 지향하는 구도자 안에도 자기보존의 본능과 그 본능을 부추기는 속됨이 다 들어있지 않겠는가. 속되고 속되어 천박한 면도 다 담겨 있거늘, 그것을 숨기려 해봤자 억압만 심해져서 결국 마음의 병을 키운다. 사람이 고상하고 지적일 수만은 없다. 때로 지리멸렬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리석은 면모들을 돌봐줘야 지적인 고상함이 역겨운 억지스러움으로 변모하지 않는다. 철학자도 가끔 연예가 중계나 개그 콘서트를 보는 편이 낫다는 말이다. 사람이 항상 평화주의자일 수만은 없다. 내재된 동물적 폭력성을 충분히 억제할 자신이 없거들랑 이종격투기 프로그램이라도 간혹 봐주며 간접 분출시키는 편이 낫다. 같은 측면에서 사람이 쎅스에 무심할 수는 없다. 성욕을 억눌러 위선적 색탐을 폭발시킨 성직자의 예는 인류사에 수두룩하다. 부부지간에 왕성한 성생활을 영위하든지, 그런 여건이 못될 경우 때때로 야동이라도 구해보며 자신의 성적 본성을 돌봐주는 편이 낫다. (이 입장은 과거 수행 초기에 포르노를 반대했었던 입장과는 상반되며, 비록 그의 경지에는 못 미치나 어쨌든 존경하는 마광수적 입장과는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인간의 온전함을 제대로 다스리며 그야말로 '잘' 사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가 별 관심을 기울인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특히 그런 무관심과 소홀함이 자녀 교육에서 잘 보인다. 아이들의 교육은 지나치게 주지적 발달(지식 습득)에만 집중돼있는데, 지나친 주지주의적 양육과 교육은 결국 지적 발육과 성장에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많은 인지학자와 교육학자들의 주장이라는 케케묵은 원론만 다시 한 번 짚어두겠다. 어찌됐든, 나는 내 자식이 그런 역효과의 피해를 보기를 원하지 않아, 피곤하게도 세상과 싸우며 내 나름의, 아니 실은 과학에 의해서 충분히 지지받고 있는 교육방식을 고수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이 많이 놀도록 해주고, 아무 일 않고 멍청하게 있게도 해주고, 교과목과 관계없는 세상 만사에 대한 잡다한 자극을 제공해주려 하고, 그리고 가능하면 함께 놀아주고 여행을 많이 데리고 다니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애들 제대로 자라 밥벌이라도 하겠냐며 걱정한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걱정인지, 아니면 다수의 길에 가담하지 않는 국외자에 대한 반발심리의 표출인지는 내가 잘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의 아이들, 청소년이 대학입시를 겨냥한 지식습득에만 철저히 몰두해 있는 모양이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사촌들은 미국에서 자란 이들이 많은데, 대체로 자기 분야에서 자리 잘 잡고 성실하고 행복하게 살고들 있다. 가끔 그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교육 풍습에 대해 의아해 하며 내게 질문한다. "그렇게 어릴 때 많이 배우고 공부해서 그거 다 잘 알게 된대? 그렇게 안하고 청소년기에 많이 놀고 운동하는 미국애들보다 더 유식해진대?" 미국의 엘리트 층에 속해있는 사촌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만 한 자신의 동포들이 미국에서 열심히 놀며 성장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재라고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유식함에 있어서는, 또는 지적 발달정도에 있어서는 미국애들과 한국애들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 같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놀아제끼며 자란 미국인들이 더 지적으로도 뛰어나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는 말이다. 물론 일반화하기에는 많은 제약 조건이 따를 '느낌'이라 하겠지만, 나도 그 사촌의 말에 동의하는 바 적지 않다. 왜냐하면, 오로지 공부만 한 게 아니라, 성장기에 많이 뛰어 놀고, 취미생활도 하고, 특기도 키워주고 하며, 전인적 성장을 도모한 미국 아이들이 결국 장기적으로 지적 발달에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한국 청소년을 앞서는 측면이 많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느낌'이고 관찰이다. 사람은 너무도 각각 다른 존재라, 어떤 애들은 별다른 부모의 지원도 없는데 혼자 왕성한 지적 욕구에 넘쳐 수재로 성장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이런 독특한 아이들이 '공부하는 방법' 운운하는 책을 써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리고 아이비 리그에 진학해서 우등상을 받곤 한다. 이런 애들은 극소수의 특출난 사례로, 유전자 차원에서 - IQ 뿐 아니라 근성에 있어서도 - 그런 특출성을 보장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본다. 한국 아이들의 다수가 이런 애들을 흉내내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 나는 이 싸이트의 '책의 지혜' 쎅션에 인요한 선생의 자서전을 포함시켰다. 그 양반이 아동기에 건강하게 뛰놀며 순천에서 자라난 이야기에서 특출함을 찾기는 어렵다. 그는 자유롭게 개구쟁이로 성장하며 자신의 인간성의 모든 면모를 고르게 체험하고 발육시킬 수 있었고, 거기에서 그의 전인적 성숙의 틀이 잡혔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 자신을 바쳐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쉼없이 밝혀내는 대단히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그가 돈이 많아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권력이 있어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명예를 거머쥐어 존경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베푸는 그 도움 때문에 그를 존경한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 자체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오로지 제 몫, 제 돈, 제 명예, 제 권력 챙기는 데만 급급한 '엘리트'로 키우면 더 바랄 게 없는 것이 우리네 자녀 교육의 핵심이라면, 나는 인요한 선생을 대단히 부적절한, 또는 불필요한 예로써 제시한 셈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지향하는 삶인가, 아니면 그보다 더 잘 사는, 즉 온전한 진짜 자신으로서 진짜 잘 사는, 그래서 공동체의 빛을 밝혀주는 것까지 지향하는 삶인가, 그 선택에 대해 고민해보는 부모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지 않는 한,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고 본다. 나는 내 아이들이 제 재능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순수한 열정을 학원 순례의 압박 속에서 상실하지 않고 자라나서, 그 재능을 마음껏 펼쳐 온전한 제 꼴대로 살면서, 동시에 세상에 기여도 하는 이들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과외와 학습지보다 자유시간을 더 주려고 애쓴다 - 종종 '현실적'인 애엄마와 언쟁을 일으키면서까지. (나같은 남자를 두고 '간큰놈'이라 지칭한다고들 한다; 돈도 잘 못 벌어다 주면서 아이 엄마에게 대드는 인간은 실로 간이 부을 대로 부은 놈일 테고.) 내가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들이 전인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일뿐이다. 이 땅에서 그짓 하기란 게 갈수록 어려워진다. 특히 큰애가 초등을 넘어 중학교로 가게 됨에 따라.

첨언컨대, 나는 '전인적'으로 잘 성장했다고 자부하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그런 가치를 선전하는 것을 무자격자의 만용이라 욕하지 말라. 제가 못 가진 것의 가치를 타인들에게 선전하는 게 죄가 되진 않는다고 믿는다. 나는 못 가졌지만, 그걸 가진 이들의 훌륭함과 위대함은 익히 보고 들은 바 적지 않다. 혹여 내가 수십 년 수행 끝에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진정한 '선생'이 될런지에 대해선 완전히 희망을 버리진 않고 있지만, 지금 내가 그런 선생이 되기에는 턱없이 못미치는 인품이라는 점은 누누히 밝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신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전인적' 인격의 성숙에 관해 선전하는데, 이건 선생으로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일종의 소개자, 중개자, 정보 제공자 정도의 입장에서 그러하고 있다는 점은 밝혀 두겠다.

내가 지향하는 '전인성' 또는 '온전함'은 세상의 잣대에 따라 스스로를 옭아매어 타인들에게 숭고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그런 스테레오타입 너머에 있다. 그런 것에 붙잡히고 얽매어 있지 않고, 거칠 것 없이 제 갈 길 찾아가는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착하면서도 제 몫도 챙길 줄 알고, 거룩한 곳을 바라보면서 천박한 인간성도 보듬을 줄 알고, 지성적이면서도 유치찬란하게 히히덕거릴 줄 알고, 평화지향적이면서도 육체 활동을 통해 폭력성을 변형시킬 줄도 알고, 쎅스의 쾌락 이상의 의미를 존경하면서도 쾌락주의적 습성을 인정할 줄 아는 자유로움을 지향한다. 내가 그러할 수 있기를 바라고, 내 자식들이 그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러할 때, 즉 자유로울 때 신의 완벽성과 닮은 내 최고의 경지가 펼쳐진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전할 때 나는 자유롭고, 자유로운 나야말로 신성함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다. 내 경우엔 그것이 내가 태어난 목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아마도 다른 이들의 경우에도 그러하리라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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