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꿈 - 부정(父情)의 레옹 (2008/4/9)

[결론도 없는 황당무계한 꿈 이야기임.]

나는 비밀 암살단의 요원이다. 암살단 본부 저택에 최고 보스와 몇 명의 요원들이 모였다. 나는 저택의 거실에 보스와 함께 있고, 저택의 다른 쪽에는 남녀 요원이 한 명씩 있다. 나는 어린 두 딸을 이곳에 데리고 왔고, 딸들은 넓은 저택이 좋다며 어느 구석에선가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 보스는 늙은 무술의 고수로, 일본 무사도 정신을 계승한 듯한 흐트러짐 없는 옷차림과 자태를 보이고 있다. 나는 그를 신뢰하고 존경한다. 저택 안의 다른 두 요원들도 실력있는 자들이다. 내가 딸들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본부 저택이 넓고 쾌적해서 애들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보스와 함께 있는 거실은 파노라마처럼 거대한 유리창들이 3면을 둘러싸고 있어 바깥 풍경이 환하게 다 보인다. 밖에는 먼발치로 비탈진 언덕이 있는 구릉지 형태의 초원이 보인다. 나와 보스는 말없이 창밖만 보고 있다가 모두 함께 식당에 가기로 했다. 나는 딸들을 부르러 거실 뒤쪽으로 가려 하는데, 나보다 훨씬 치밀한 보스가 눈빛을 밝히며 주위를 살핀다. 그가 뭔가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뭔지 알지 못한다. 보스는 아무 일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나와 함께 거실을 떠나려 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가 뒤돌아서서 창밖을 노려본다. 나는 보스에게 무슨 일이냐 묻는다.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올 것이 왔다."

보스의 시선을 따라서 창밖을 보니, 구릉의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이들도 있다. 그들과의 거리는 50미터 정도밖에 안돼보인다. 그들은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들의 수는 점점 불어나 수십에 이르고, 그들이 저택 앞의 3면을 빙 둘러싸듯 포위한 채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나는 어찌 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를 죽이러 온 적들이다.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줘야 할 보스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다가오는 적들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 드디어 적들이 총을 쏘기 시작한다. 거실의 거대한 유리창은 총알을 맞고도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야구공 크기 만 한 총알구멍들만 내고 있다. 그제서야 나는 황급히 내 발치에 떨어져 있던 M16 소총을 집어든다. 예전에 군대에서 쓰던 총과 흡사한 총이다. 중과부적이어서 승산이 전혀 없지만,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보스는 총을 쏘려던 나를 보고 엄중히 꾸짖는다.

"쓸데없는 짓!"

그리고는 그는 사무라이처럼 그 자리에 정좌한다. 가슴을 쭉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눈을 지긋이 감는다. 명상에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런 그가 존경스럽다. 수많은 적들은 4-5미터 앞에까지 다가왔다. 모두들 양복 정장에 총을 들고 있었다. 바로 목전에 적들을 두고 나는 총을 내려놓았다. 존경하는 보스를 따라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저렇게 죽음 앞에서 명상하는 것이 이 순간의 최고의 선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좌해보려는 순간, 도저히 나는 보스처럼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치민다. 이유는 단 하나, 딸들 때문이다. 나는 명예롭고 존경할 만 한 죽음을 맞는 사치를 누리기에는 딸들의 목숨이 너무도 소중하다. 적들은 나를 죽인 뒤에는 아이들마저 잔인하게 죽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안 뒤쪽으로 쏜살같이 뛴다. 스승과도 같은 보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고하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것이 매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보스는 나를 말리지 않고, 나도 보스가 다 이해해주겠거니 생각하며 온 힘을 다해 뛴다. 적들은 이미 유리창을 개머리판으로 깨며 거실로 진입하고 있다.

저택 뒤쪽의 방에 서있는 두 요원을 지나치니 딸들이 있다.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표정으로 놀고 있다. 나는 왼 팔로 둘째 딸을 안고, 오른 손으로 첫째 딸 손목을 움켜쥐고는 뛰기 시작한다.

"시시야, 가자! 나나야 아빠 꼭 잡아!"

나는 그렇게 저택의 뒷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다행히 그쪽까지는 적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앞만 보며 필사적으로 뛴다. 느껴지는 것은 품안의 둘째 딸의 체온과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있는 첫째 딸의 체온뿐. 죽어라고 뛰다보니 유원지 같은 곳으로 들어가게 됐다. 내 뒤에 적들이 뒤쫓아오고 있는지 고개를 돌려볼 틈도 없이 나는 뛰기만 한다. 유원지 안에는 사람들이 조금 보인다. 나는 풀장 주변의 파라솔 사이로 계속 뛴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밖에 없다 - 딸들을 적에게 내줄 수는 없다는.

그렇게 유원지 안을 뛰다보니 높다란 미끄럼틀 꼭대기에 도착했다. 발밑으로는 물이 흐른다. 나는 다시 딸들에게 아빠 몸을 꼭 붙잡으라고 말한 뒤 미끄럼틀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 물미끄럼을 타고 풀장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려간다. 철없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꺅꺅거리며 좋아한다. 무사히 아래의 풀장 물속에 빠진 나는 다시 아이들을 끌고 뛰기 시작한다.

드디어 벼랑 끝까지 왔다. 이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작은 딸을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큰 딸의 손목을 잡고 절벽 위에 서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내게 보인다. 벼랑 끝에 서있는 나의 등 뒤로는 태양이 붉게 떠오르고 있다. 내 눈에 보이는 나는 고독하지만 자랑스러워 보였다. 벼랑 끝에 와서야 나는 오던 길을 돌아본다. 적들이 쫓아왔는지 어쩐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적들이 몰려오면 딸들을 데리고 절벽에서 몸을 던질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알 수 없는 평온함이 가슴속을 채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여기에서 꿈은 끝나고 나는 눈을 떴다.

아침 식탁에서 꿈 얘기를 하자 꿈 분석을 조금 배운 아내는, 내가 무적의 람보처럼 적들과 환상적인 전투를 벌이지 않고 딸들을 데리고 탈출한 것은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도 적들과 필사적인 싸움을 벌임에 의해 숨겨진 공격성이 드러나게 되지 않은 것은 긍정적이라고 본다. 이보다 더 세밀하고 정교한 해몽이 필요하다.

혹시 나는 해탈로 이끌어줄 사부를 버리고 부정(父情)을 택한 것일까? 성철 스님이, 장성하여 자신을 찾아온 딸을 박대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나는 그런 것을 못한다는 것을 꿈이 알려준 것 같다. 앞으로 더 곱씹어볼 생각이다.

[길벗님들, 해몽을 보내주시면 사양하지 않겠음.]

* P.S. (4/10)
오랜 단골이신 길벗님 한 분께서 자신의 유사한 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오셔서, 그에 대한 답신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분께서는 꿈속에서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느꼈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저의 꿈의 경우와 같더군요. 저는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냈습니다:

사실 길벗님들의 '해몽'을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 스토리도 허접하고 유치한 것 같고 해서요 -, 예상 외로 일찍 님의 반응을 접하게 되니 기쁩니다. 저도 말씀해주신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그 '죽음'이 바로 영혼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의 목적이겠죠. 헌데 저는 첫 번째 기회에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딸들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그런데 딸들을 양팔에 끼고 벼랑 끝에 섰을 때에는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마음이 되더군요(불경기에 잦은 가족동반자살 모드와 비슷한 것이 찜찜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마지막엔 고요와 평화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이란 나의 자아(ego)의 죽음을 뜻하겠죠? 자아를 너무 쉽사리 버렸다가는 처자식 못먹여살릴 거라는 제 마음 속의 불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결국에는 버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한가보죠. 또 결국에는 버릴 수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남 얘기하듯 말하는 게 우습네요. [중략]

[길벗님들의 해몽을 사양하지 않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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