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조언 (2008/11/24)
©
Suk Hoon Han
프로이드나
융을 끄집어내어 읽을 때마다 꿈을 더 많이 꾸는 것 같다. 며칠 전 밤에
꾼 꿈은 그중에서도 생생하여, 잠이 깨자마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두었다:
-----------------------------------------------------------------------------------------
내가 작은
욕실에서 열심히 몸을 닦고 있다. 목욕하기를 귀찮아 하는 나이건만,
웬일인지 평소와는 다르게 공들여 열심히 목욕을 한다. 마치 목욕재계를 하는 것 같다.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 내가 극장의 컴컴한 객석을 빠져나와 밝은 홀을
걸어간다. 극장 안에는 나의 지인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안은
'지독한 속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홀에 '국민 배우' 안성기씨가
서있다가 나를 반가이 맞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지만 여기에서는 서로 일면식은 있는 사이로 관계 설정이 돼있다. 그가 나를
거의 감싸안을 정도로 반기는 것이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나는 그가
유명인사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한 사람이라는 점을 알고 있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실제로 반가이 맞으려던 상대는 내가 아니라 객석에 있는 나의
지인들임에 틀림없다고 추정했고, 그래서 그가 나를 그렇게 환대하는 것이 당치 않기라도
하다는 생각에, 무례하지 않게 은근슬쩍 그의 손길을 사양하며 이렇게 한 마디 해준다: "저 안에 애들 많이 있어요."
마치 내가 아니라 "애들"에게 그렇게 대해줘야 자연스럽다는
듯이.
그러나 안성기씨는 '애들'을 찾아 객석으로 향하지 않고
내곁에 계속 머물며 이런저런 말을 다정하게 건넨다. 그러면서 자신의
곁에 서있던 검은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성을 소개시킨다. 나는 그녀를
아는 것은 같은데, 그녀의 얼굴은 전혀 모르겠다. 감을 잡을 수 없는
얼굴, 미녀인지 추녀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안성기씨와는 대조적으로 나를 대단히 차갑게 대하여, 눈길도 내쪽으로
돌리지 않은 채로 하는 듯 마는 듯한 인사를 한다. 마치 자신이 안성기씨와
함께 나를 만나줘야 한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녀는 계속 안성기씨
곁에서 나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다닌다. 나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서, 지금 내게 베풀어지고 있는 안성기씨의 호의와 그를 에스코트해야
하는 그녀가 이곳에 함께 있어줘야 함이 내게는 과분한 대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음료수를 꺼내 마시기 위해
홀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어 뒤지기 시작했다. 헌데 안성기씨는 명망있는
거물인데다 나 같은 이름없는 필부에게 친절을 베풀 이유도 없는 이임에도
불구하고 - 계속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 -, 내 곁에 쭈그리고 앉아 그
냉장고 안의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며 계속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나는 그가 내게 과분한 대접을 해준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의 부지런한
'선행'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선생님께서 그냥 '바른생활맨'인 것처럼 말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의 행동이 내면의 [신성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안성기씨는 예의 그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답한다: "그렇지 않아." 그것은 예의를 차리기 위한
겸손의 말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강한 부정도 아니었다. 뭐랄까,
내 말을 부분적으로 긍정해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듯한
여운을 띠고 있었다.
갑자기 자리가 바뀌어 극장 홀 옆의 방에
셋이 함께 와있다. 나는 느낌만으로 그곳이 누구의 집인지 안다. 그곳은
C라는 내 주변 인물의 집인데, 그는 상당히 부유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집에 없고, 나는 그의 집 거실에 깔려 있는 카펫 위에
앉아서 한 손에는 위스키 언더락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카펫 위에
지저분하게 떨어져 있는 땅콩 껍질을 줍고 있다. 아마도 내가 위스키를
마시느라 땅콩을 함께 먹은 것인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그때 안성기씨가 내 친구 R에
대해서 말한다. R이 집에서 텔레비전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R은 꽤 지적인
추구가 강한 인물이어서, 멍청하게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성기씨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다. 그는
R이 끊기 힘든 중독성 습관인 텔레비전 보기를 그만 두고, 텔레비전을
팔아버리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그것은 R이 평소에 그리도
희구했던 '순수한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친구 R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나는 술을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위스키 같은 것은
1년에 한 잔 마실까 말까 하건만; 물론 소주, 맥주는 꽤 많이 마신다.]
잠시 후에 차를 몰고 집에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술잔에 남아있는 위스키를 마저 마셔버리려 한다.
나는 귀갓길의 음주운전 단속을 떠올리며 나의 그런 행동이 잘못 됐다는 것을 깨달아 안성기씨를 보기가 부끄러웠지만,
그는 조금도 나를 책망하지는 않는다. 이러는 동안 검은 원피스의 여인은
시선을 딴 곳에 돌린 채 곁에 머물러 있다. 안성기씨가 계속 나를 자애롭게
대해주자 그녀도 조금이나마 나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다시 홀로 돌아와 객석 입구의 티켓 박스
앞에 섰다. 박스 옆에 정교한 LCD 스크린이 있고, 그 터치 스크린을
조작하여 내게 딱 맞는 종류의 티켓을 출력해내야 한다. 나는 열심히
설명을 읽고 인내심 있게 스크린을 조작하여 마침내 티켓을 손에 쥔다.
그 티켓을 박스의 창구에 내밀고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갑자기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더니, 내 바로 뒤에 선 30대 여성이 나를 새치기하려고
한다. 나는 힘들게 겨우 티켓을 출력했는데 아무 노력도 안한 그녀가
새치기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겨 내 앞으로 파고 드는 그녀의
얼굴 위에 꿀밤을 먹이고 그녀 머리를 잡아서 창구 유리창에 세게 박아버렸다.
나의 그같은 거친 행동을 줄서있던 모든 이들이 당연하고도 칭송해줄만
한 일로 여긴다. 새치기 하려던 여자는 사라져버렸고. 창구 안에서는 안성기씨가
마치 극장 직원처럼
티켓 값을 계산해주고 있었는데,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근업한 표정으로
나의 티켓을 받으며 나의 입장 권한을 권위있는 음성으로 선언해준다.
나는 그의 인정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었고, 그래서 당당히 매표소 앞을
떠난다.
-----------------------------------------------------------------------------------------
나름대로
해몽을 시도해보자면, 안성기씨는 신성과 맞닿은 나의 고차원의 자기(Self)이고,
까만 원피스의 여인은 나의 여성성인 아니마인 것 같다. 차가운 아니마는
종종 꿈에 나타나지만, 아니마가 '자기'를 모시고 나오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내면의 신을 알현하기 위해 목욕재계를
했는가 보다.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며, 내가 그의 정체를 알아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나를 긍정해주지만, 내가 몸에 밴 습성을 떨치고
한층 더 도약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친구가 텔레비전 보는 습관을
버렸다는 예시를 건네준 것 같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자신만의 꿈인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을. 기독교 신자의
집에 술냄새를 풍기고 지저분한 것들을 떨어뜨린 데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나는, '자기'의 바램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지만,
그의 바램에 부응하는 쪽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아니마의 느낌이 조금 긍정적으로 변했다.
티켓 박스
앞에서의 폭력은 일상의 나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다 - 그것도
여성에게! 그러나 그 폭력 행사에는 희안하게도 분노나 증오, 또는 야수성이
결여됐고 마치 사무를 처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내
내면의 귀퉁이에 침전물처럼 남아있던 잠재적 공격성이 인격화한 일종의
원형(archetype)이었던 것으로 짐작한다. 그녀를 '복수의 원형(Archetype
of Revenge)'이라 부르는 게 적절할 듯 싶다. 나는 내 안의 공격성을
무찔러버렸고, 그러자 고차원의 자기인 안성기씨는 내게 합당한 티켓을
건네주며, 내가 다시 '지독한 속세'인 극장 안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점을 선포해준다. 즉, 내가 나의 오랜 습성을 뛰어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고, 또 사소한 감정의 끄달림의 연원이었던 공격성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자기'가, 이제부터는 내가 속세로 되돌아가서
내가 원하는 바를 추진해도 좋겠다는 인가를 내려준 것 같다.
물론
해몽이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겠다. 특히 분석심리학의
전문적 훈련을 전혀 받은 적도 없는 내가 시도하는 해몽이란 한마디로
넌센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쪽 학자들도 전문가인 타인 뿐 아니라 비전문가인
본인의 이해도 또한 꿈의 해석에서 중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들 강조하니,
내가 전문가의 상담을 청하기 전까지는 내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약 2년 정도 줄곳 융의 사상과 분석심리학에
대한 책들을 읽고, 그에 관해 상상하고 생각하기를 지속해온 결과, 융과
같이 내 꿈을 해석해줄 전문가를 만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물론 꿈을 해석해줄 전문가란 심리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깊고, 풍부한 임상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융의 원형 등을 제대로 이해하여 내 마음 속의 상들을
적절히 파악해줄 수 있기 위해서는 인문학, 역사학, 종교학 등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갖춘 이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런
고수 정신의학자가 이땅에 수십 명이라도 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런
고수를 알현할 은총이 내려지기 전까지, 나는 내 해몽의 타당성을 삶을
통해서 시험해보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겠다. 안성기씨가 내
꿈에까지 나와서 수고를 하신 것은, 내가 평소에 실제로 그가 단순한
도덕군자 같은 '착한 사람'의 수준을 넘어서는, 도인의 경지에 다가가
있는 인물인 것 같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함의 표본과 같은
이의 탈을 쓰고 나온 나의 '자기'는 자신의 정체가 선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넌지시 알려준다. 어쨌든 나는 그를 내 온 존재로 맞아들이기
위해 그가 건네준 극복, 또는 초월에 관한 조언을 그 이후로 마음에
담고 생활하고 있다. 또한 그가 나를 인가해줬다는 점도 고무적인 내면의
움직임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나 혼자 북 치고 장구치며,
앞으로 모든 일이 잘 될테니 걱정일랑 버리고 신나게 살라며 자기 위안의
원맨쇼를 벌인 것과 같다. 확실히 꿈보다 해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