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惡) (2008/4/21)
 

© Sukhoon Han                                                                                                                                                                                 
 
 

시험

                             경북 울진 온정 초등 4학년 권현석

한 문제 틀려서
쫘악 긋는 옆짝
내 가슴이 쭉 째지는 것 같다.
맞으면 내 가슴이 펄쩍 뛴다.
나는 틀리고
다른 아이가 맞으면
머리에서 뿔이 난다.


- 『딱지따먹기 - 아이들 시로 백창우가 만든 노래』, 보리, 2002, p. 46

남이 잘되면 배가 아프고, 남이 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다. 그러한가? 악이란 무언인가? 이 솔직한 동시를 읽고 곰곰히 생각해봤다.

첫째, 아이가 어른이 만든 경쟁체제 속에 강제로 집어넣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점수로 서열화되고 그에 따라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 달라지는 체제 속에서는 타인의 득이 나의 실일 수밖에 없다. 그런 체제 속에서 아이가 타인의 득을 싫어하고 타인의 실에 박수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무도 그 아이를 나무랄 수 없다. 우리의 학교가 그런 체제다. 우리의 사회가 그런 체제다. 인간의 악행이 문명세계라는 환경에 기인한 것이지, 인간의 마음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시각은 서구에서 태동한 근대학문의 주요 전제다.

세상은 원래 그런 체제일까? 세상은 워낙에 언제나 그러했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인가? 이것은 혹 그런 체제인 현대라는 세상에 푹 묻혀 살고 있는 자그마한 나의 빈약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은 아닐까?

둘째, 악은 실체 없는 환영이라는 생각을 한다. 악의 실체성이라는 환영은 우리가 악에게 힘을 실어줄 때 더더욱 견고해지지만, 타인의 손실을 바라는 악한 마음은 워낙에 자기애에서 자라난 뒤틀린 심사라는 생각을 한다. 근원은 악이 아니라 자기애라는 선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외적조건에 따라 뒤틀리게 될 때 악으로 변색되는 것 같다 - 애초에 절대악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물론 입증할 바 없지만.

셋째, 선과 악은 언제나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선은 항상 악으로 변색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악을 비난하고 제거한다고 하여 그것이 다시 자라나지 않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선이 지나치게 선명해도 악을 자라나게 한다. 캘빈주의 신정국(神政國)이 공포정치를 잉태하고, 프랑스 시민혁명이 피에 굶주린 길로틴을 일으켜 세웠듯이.

동시의 아이과 같은 악한 마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이의 자연스러운 심리를 어른이 비난하고 꾸짖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아이가 나쁜 마음을 글로써 표현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렇게 어린 아이의 경우. 그러나 타인의 손실에 기뻐하는 마음을 칭찬하고 키워줄 수야 없는 일이다. 그렇다 해도 꾸중은 부적절하고 비효과적이다. 어찌 해야 할까?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나는 아이가, 청소년이 - 그리고 실은 나같은 성인까지도 - 자신 안의 악을 숨기지 말고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선생은, 그 악이 아이의 마음 속에서 어떻게, 왜 자라났는지를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인내를 갖고 지켜보고 지도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초등학교 수준의 아이들은 간혹 부모에게 따끔한 꾸중을 듣는 일도 필요하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꾸중 자체가 - 너무 빈번하지만 않다면 - 자신에 대한 존중의 표시임을 아이들도 결국에 알게 된다. 허나 대체로 꾸중이 아니라 묵묵한 지원과 믿어줌, 그리고 다양한 지혜를 체험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일 이외의 어떤 효과적인 방법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주말에 초등학교 동창 여럿과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새삼, 나의 아동기적 악행과 비뚤린 심보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내가 아동기의 나를 악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실은 나는 나의 악함을 그때 경험해볼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어른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결코 나쁘게 보지 않는다. '쟤들이 벌써부터 제 안의 저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다뤄보려는 영혼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구나' 하는 감상으로 바라본다. 영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애들이 기특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애들을 긍정적으로 참을성있게 봐주는 한, 그 아이들은 반드시 제 길을 스스로 찾아갈 것이다. 헌데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듯 하다. 애들을 믿고, 애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거늘. 애들한테 스스로 자신을 찾아갈 시간을 줘야 하거늘. 기성세대의 삶이 영적으로 메말랐으니 자신의 2세들에 대한 여유로운 관용정신도 갖고 있지 못하다. 사소한 일탈을 포용해주지도 못한다. 아이들이 제 길을 찾을 시간과 기회를 전부 빼앗고 오직 학습기계로서만 그들을 다룰 때, 그 애들이 자라서 실로 악인이 돼버린다면 그건 어른들 책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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