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과
이해 (2008/11/11)
©
Suk Hoon Han
C.G.
융의 사상을 읽다보면, 사람은 스스로 체험해보지 못한 범주의 사건이나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융의 '그림자,' '아니마,' '심혼,' '원형' 등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가 그것들에 대한 체험의 부재에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 지적으로는 이해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해가 한 개인의 정신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체험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융의 이론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난해한 문장의 집합체에 불과한 경우가 많은가 보다. 또한 융과
같은 이른바 '신기(神氣)'를 공유하지 않은 이에게도 그의 이론은 이해하기도,
믿어주기도 어려운 기이한 것일 수 있겠다. 나 자신, 신기
같은 걸 지니고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그나마 자아 초월 체험을 한
번 했기 때문에 융 사부님의 사고 방식을 그럭저럭 따라갈 수는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융의 이론은 앞으로도 계속 다수에게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융 사부님 사정이고, 문제는
나 자신의 사정에 있다. 종교나 교육 등등에 대한 나의 주장들은 거의
다 모종의 체험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이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종교 체계의 개입을 거부하는 신앙의 개인 플레이라든가, 그런
태도의 밑바탕이라 할 수 있는 제반 종교들의 공통 인자에 대한 인식
등은 지적인 작업의 결론이기 보다는 삶속에서 체험한 것들로부터 뽑아낸,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삶의 태도로서의 귀결이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체험한 신으로부터는 어쩔 수 없이 그런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또 교육이라는 것도 사회의 틀에 개인을 짜맞추는 측면 보다는
사회를 초월할 수 있는 개인의 내적 잠재성을 끄집어내주는 작업이라는
나의 태도도 실은 시카고 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의 결과물이 아니라, 사십여
년 겪어온 내 삶의 총체적 결론이다.
여기에 나의 문제가
있다. 나는 체험으로써 그런 결론들에 도달했는데, 체험의 요소를 빼버리고
순전히 지성적인 작업으로 그 결론들을 지지해보라면, 글세... 나로선
그리 할 자신이 없다. 지성의 결론은 오만가지가 될 수가 있다는 점을
나의 '지성'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만의 고유한 체험을
통해서만 특정한 결론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심하게 말해서
나의 결론들은 지적인 보편성이 보장되는 것들이 아니다. (물론 나는
마치 그것들에 지적인 보편성이 충분하다는 듯한 정보를 꽤 많이 들이댈
수는 있지만.) 따라서 어떻게 나와 같은 체험을 공유하지 않은
타자들에게 나의 결론을 수용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나의 문제다.
신은 인간이 만든 전통의 체계와 조직을 통하지
않고 자연의 존재인 인간과 직접 '내통'할 수 있다는 결론을 체험의
공유 없이 어떻게 타인들과 나눌 수 있을까? 모든 종교가 자아의
초월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영적인 기술(技術) 체계라는
결론을 체험의 공유 없이 어떻게 타인들과 나눌 수 있을까? 교육이 지성과
사회성의 완성을 넘어서 개인의 참된 자기(自己)의 발현이라는 존재론적
목적을 지닌다는 결론을 체험의 공유 없이 어떻게 타인들과 나눌 수
있을까?
오랫동안 지적인 작업이 그러한 나눔을 꽤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무비판적으로, 암묵적으로 믿어왔다. 그런
나의 믿음에 회의심이 든다. 이는 그간의 나의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자평이다. 헌데 나의 작업에 대한 긍정적인 평의 소지도 전혀 없지는
않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체험에 기반한 이해'를 도모할 방식들을
모색해오기도 했다는 점이 그것이다. (그 방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지는 '사업 기밀'로 감춰둘 생각이다.) 어찌됐든 간에, 융 사부께서도
일찍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셨을 것임이 틀림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같은 난해한 저술들을 계속 생산하셨을 것이다. 나는 지적으로 - 또,
영적으로도! - 융 사부의 경지에 도저히 미치지 못하니 그런 저술을
집필해야 할 의무감에 시달릴 이유는 없다. 그저 내 수준에 맞는 방식으로
사부님께서 일러주시고, 그래서 내가 공감하고 이해한 그 진리의 조각들을
표현하고 나누면 될 따름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책을 뒤져서
나의 '결론'들을 뒷받침해보려는 욕심은 좀 자제하고, 그 결론들에 이르게
한 체험을 타인과 나눌 수 있게 해줄 현실적 방법에 대한 궁리를 많이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