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2008/6/24)
©
Sukhoon Han
때때로
내가 전생에 고생을 많이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건,
일상에서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 정도면 나한테는 감지덕지한 것이지'라고 늘 느끼며
살기 때문이다 - 그것이 좋은 것이 됐든, 나쁜 것이
됐든 간에.
어쩌다 몸이 아파서 폐인처럼 자리에 누워, 잠도
제대로 못이루고 밤새 뒤척이다 여명을 맞이할 때면, 먼동이 터오는
이 순간에 아직 더 방바닥에 등붙이고 누워서 휴식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진다. 마치 아무리 아파도 해뜰 녁엔 몸을 일으켜서
일터로 나가야만 하는 고된 삶에 시달려오기라도 한 듯이.
요즘같이
먹을 게 흔한 세상, 연구실에서 혼자 일하다 점심거리로 찬밥 덩어리에
찬 두어 가지 놓고 먹는 궁상을 떨면서도 식재료의 맛을 천천히 음미한다.
까칠한 밥알의 촉감과 김치의 신 맛을 느끼며 감사한다. 마치 북한 동포들처럼 끼니도
제대로 못 잇고 살아오기라도 한 듯이.
딸과 단 둘이 있게 되면
- 큰 녀석이건, 작은 놈이건 -, 그리고 그 딸이 애비에게 재롱과 웃음을
선사해주면, 한없이 마음이 따스해지며 이 순간을 허락해준 천지만물과
신께 감사의 합장을 하게 된다. 마치 평생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살아오기라도
한 듯이.
아이들이 팔다리가 곧고 건강하여 쾌활하게 웃고 까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크나큰 은혜에 대한 감사의 염이 가슴을 꽈악
채운다. 마치 병약한 자식들 키우느라 오랜 세월 고생하기라도 한 듯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돈벌이도 제대로 안하고 사는 주제이면서도, 시간강사로 대학에
나가 학생들 가르치는 돈도 안되는 일을 성스럽고 영광된 일로
여기며 감사한다. 마치 벌어먹기 위해 영혼을 파는 일만 평생 하며 살아오기라도
한 듯이.
청명한 날에 일터로 가다 활짝 핀 꽃이라도 보게 되면,
이처럼 아름다운 하루를 가져다주신 신께 감사기도를 올리게 된다. 마치
암울한 감옥에 오랫동안 갇혀있기라도 한 듯이.
나를 반기지
않는 어떤 일상에 마음이 상하여 나 자신의 자그마함에 좌절하게 될 때,
즉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을 찾게 되고, 나로 하여금
신을 찾도록 어려운 경험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마치 자신을 돌아보고 신을 찾을 여유도 없이 각박하고 메마른 삶에
시달려오기라도 한 듯이.
크리스천들은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는
모토를 자주 내세우는데, 그런 척도로 보자면 온갖 순간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는 나는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대단히 굳건한, 실로
경건한 신도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나는 그런
인간이 못된다: 나는 경박하고, 이기적이며, 고집불통의, 노화해가는
육신에 매달려 있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에 불과한가를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나는 크나큰 긍지를
지니고 있다.) 나는 '경건한 신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그런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은총을 누린다는 게
신비다. 이건 결코 공평한 처사가 못된다 - 인간적으로 볼 때. 세상의
훌륭하고, 위대하고, 성스러운 수많은 사람들에 비할 때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나라는 인간이 왜 순간, 순간에 감사할 수 있는 행복을, 호사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그건 내가 결정한
게 아니라, 신께서 그렇게 마음대로 결정하신 것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무튼 불평 투성이었던 어렸을 때에 비해 지금의 감사하는 내 모습이
훨씬 낫다.
'나'를 다 내려놓고 비워야 불공평해보이는 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나'가 자랑스럽게 살아있는 한은 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의 뜻을 받아들여야 이같은 불공정 사례 -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신의 은총을 받는다는 - 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내가 신의 뜻을 이해한다는 말은 아니다, 다 주관적인 것이므로.
(모두가 다 제각각 주관으로만 본다면, 세상에 의미있는 게 과연 무엇이겠으며
모든 게 엉터리일 것이라고 비관하지는 말라. 내가 알기로 신이란 모든
주관의 합일이다.)
나는 깝죽대기를 즐기는 경박함을 여태 버리지
못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