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존재론 (2008/1/20)
©
Sukhoon Han
[원고
발췌 17]
[이단
도학자 장원이 계속 말한다.]
"난 우리나라 대다수 인구의 본질적인 언어생활이 대한민국의 표준어 권장정책 때문에 엄청나게 많이 훼손됐다고 봐. 쉽게 말해서, 지방 출신인 사람이 제 고장의 언어인 ‘사투리’를 무시하거나 져버리게 되는 경우가 그러하지. 이른바 ‘표준말’이라는 서울 말씨는 보편타당한 것이고, 나머지 지방 방언들은 국지적인 것이어서 지양할 대상이라는 생각, 이것이 우리나라 전체에 얼마나 많은 깊숙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지. 전라도 말씨가 아니고선 자신도 자연도 표현할 줄 모르는 토종 전라도 촌놈들이 보기엔 서울 말씨 배워서 쓰는 이들이 죄다 가짜 같어. 이건 경상도 토백이 헌테도 마찬가지 얘기일 테고. 봐, 길가에 핀 엄한 꽃을 보고 ‘제라늄’ 해싸면 그건 진짜로 내 삶속에 들어오는 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이름표, 딱지가 될 뿐이여. 고놈 보고 쥐손이풀이락 해야 비로소 ‘진짜 꽃’이라고 나가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 내 머리로, 가슴으로, 오감으로, 내 온 존재로!
지방의 사투리는 그 지방 사람들의 영혼이 녹아있는 ‘존재의 집’이여. 난 서울 사람들이 인간성이 피폐해지고 이기적이 된 것이 단순한 ‘도시화’의 결과가 아니라, 도시화가 되면서 자신의 고향의 언어를 잃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봐. 제 고향의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은 이른바 ‘표준말’을 연마해서 그것을 어느 정도 쓸 수는 있게 되지. 문제는, 이렇게 제 고향의 언어도 아닌 서울 말씨를 자신의 ‘존재의 집’으로 바꿔 탄 사람들이 본래의 자신대로 잘 살지를 못한다는 점에 있겠어. 사실, 수도권과 전국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인 이 사람들헌테 서울 말씨는 본래의 자신으로서 타인들과, 또 세상과 자연과 하늘과 제대로 관계를 맺도록 도움을 주지 못허지. 자신의 고향의 사투리로써 말할 때에야 비로소 제 이웃들과 본래의 인간적인 자신으로서 소통하고, 관계 맺을 수 있고, 신이 선사해준 제 주변의 자연에 대해서도 본래의 자신으로서 소통할 수가 있게 되거든.
촌에 사는 우리들은 서울말씨에 정나미가 없다고 봐. 너무 차갑고, 공식적이고, 산뜻하고, 깔끔하고, 계산적이어서 인간 본래의 인정이 안 담겨 있어. 물론, 소수의 토종 서울 촌놈들은 서울말을 써야 제 본래의 정을 낼 수가 있겄지만. 이 ‘정’이란 거, 난 이게 한국인의 정신의 본질적인 중핵이 아닐까 생각해. 고걸 잃어버리면, 글세, 우리 민족의 앞날이 어찌 될지 참 난감혀. 자네, ‘정’에 대해서도 생각혀 봐, 학교 지을 때 말여. 학생들을 정 있는 넘들로 키울지, 정은 없어도 경쟁력 있는 엘리트로 키울 것인지.”
한참동안 펼쳐진 장원의 ‘사투리 존재론’에 N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난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고, 평생 서울말만 쓰고 살아서 무슨 얘긴지 이해가 잘 안가는 건가? 내가 딱히 정이 없지도 않은 것 같은데...’
*
둘째 딸 나나가 개를 하도 좋아해서 '하얀 마음 백구'라는 진돗개 만화영화를
구해다 보여줬습니다. 이야기의 무대가 전남 진도이고, 당연히
등장인물들은 전남 사투리를 구사합니다. 헌데 똑같은 진도 출신인 주인공
사내 애와와 계집애, 그리고 진돗개 '백구'만은 완벽한 '표준말'을
구사하고 있더군요 - 여타 개들은 다 남도 사투리를 쓰며 멍멍거리고
있고. 전남 진도에서도 가장 쿨한 주인공들은 서울 방언을 써야만 한다는
만화에 깔린 전제가 기가 찼습니다. 서울말 쓰는 주인공들과 대조적인
나머지 '덜 중요한' 배역들의 성격은 사악하거나, 무능하거나, 호들갑스럽거나,
희극적이거나, 또는 기껏해봤자 그저 '덜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이를
본 제 딸의 반응은, 사투리 쓰는 배역들이 '촌스럽고' 웃기다는
것이었습니다. 서울 표준말의 제국주의적 우월주의를 꼬집고 싶어 윗글을
끼워넣었습니다. 윗글에서 제가 범한 사투리 표현상의 오류는
남도 네이티브 스피커에게 의뢰하여 교정할 계획입니다.
물론,
사람은 다른 문화에 적응하다 보면 언어생활도 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미국에서 살다보니 꿈도 영어로 꾸고, 일기도 영어로 적고 하는
일은 일어나더군요. 그런 변화와, 자신의 고향의 언어의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