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부여

의미 부여 (2008/8/19)

[8월 19일에 올린 이 글에 대한 보충 글을 23일에 저~기 아래 쪽에 덧붙여놓습니다.]

수행 초행 길에 '신과 나눈 이야기'를 감명 깊게 읽었는데, 거기에는 세상에 우연이란 결코 없다는 '신의 말씀'이 등장한다. 광신에 접근했던 나는 그런 신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으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났음을 매 순간 명상하며 살기로 했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간에 어떤 일이 내게 일어난 데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을 것임을 믿었다. 영적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을 살짝 비틀어 표현하면, 어떤 일에 대해 근거없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으로, 즉 제 멋대로 아전인수격으로 그 의의를 부여하는 비이성적인 상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잔다르크에서, 영국군에 붙잡혀 종교재판을 받게 된 잔에게 사탄으로 분한 더스틴 호프만이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뜰에 검 한 자루가 떨어져 있던 것을 신의 계시로 믿고 그 검을 잡아들고 영국군과 싸우러 나아갔다는 잔에게 사탄은, '그 검은 그냥 그 자리에 떨어져 있었을 뿐이다'라고 말해준다. 그냥 거기에 있었을 뿐이다,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우연히. 그 검을 신의 뜻이라 믿고 집어들고 나아간 잔의 결정은 그저 개인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었을 뿐이다.

그럴까?

진짜 사탄이 있다면 이 정도의 강력한 도전은 제시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신앙심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대체로 세상에 우연이 없다는 명제를 수용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것들을 다 연결하고, 이어줘서 종국의 거대한 신의 뜻에 이르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설명해줄 궁극의 필연이 필연코 있다고 믿는 이들이 신앙인들이다. 나를 포함하여.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신의 필연이 있다는 주장과 그런 필연이 나의 에고 차원의 세속적 성취를 전적으로 지지해줄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어리석은 신앙인들은 신의 뜻이 곳 자신의 세속적 성공과 일치한다는 자기 최면을 좀체로 포기하지 못한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가르침은 그래서 무겁고 중대하다.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인 신의 침묵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신의 침묵 앞에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까? 나는, 인간은, 세상에 펼쳐지는 신의 뜻을 해석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열심히 기도하고 빌고 치성을 드린다 해서 내가 에고 차원에서 움켜쥐고 싶어하는 것을 신께서 제공해주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기복 미신이다. 신앙이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뜻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려는 오만을 떨쳐 버리고,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 특히 어둡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들까지도 신적인 자비로써 맞이하고 끌어안는 상태를 포함해야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절실히 믿고 구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것, 이 '비밀'을 세상에 함부로 퍼뜨리는 사이비들이 난무하는 시절인 것 같다. 이 귀중한 '비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즉, 내가 간구해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들은 내가 알 수 없는 '신의 뜻'에 부합되는 것들이지, 결코 내 에고의 뜻에 부합되는 것들일 수는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삶의 행보의 '영적인 의미'를 탐색하는 일은 그래서 지독하게 냉정하고 무시무시한 일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리얼리티는 무섭다. 현실은 때로 끔찍하다. 칼이 내 살을 베었으면 그 고통을 인내하고 치료를 받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현실을 회피할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믿음 따위는 마약일 뿐이다.

주절주절 읊은 추상적인 윗글들은 나의 구체적인 삶의 사건들에 대한 비평문이다.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신의 뜻'에 부합하는 '길'임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의 '싸인' 또는 조짐들을 발견해왔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싸인들을 다 따라서 가봤더니, 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는 막다른 골목, 말짱 헛 일, 도로아미타불인 경우들이 자꾸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신께서 인도해주시는 '싸인'일 것으로 믿고 계속 그 싸인을 구하며 찾아다니던 나는 시쳇말로 혼자 '삽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나는 조용히 앉아서 삽질의 의미에 대해 묵상해본다.

보충 글 (8/23)

[다음의 발췌문은 초거대 교회인 할렐루야교회의 김상복 담임 목사의 주일설교의 일부입니다.]

힘들고 불가능해도 성령께서 도우시면 안 될 것도 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성경은 선한 욕심 부리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 남의 것 빼앗고 싶은 욕심, 즉 남의 아내나 노비나 물건을 차지하고 싶은 욕심만 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해도 하나님께는 가능합니다.

[다음은 위의 김상복 목사 설교에 대한 정용섭 목사의 비평입니다: 정용섭, 『설교와 선동 사이에서』(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17-18, 22, 23-24]

아무리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설교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욕심을 내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청중을 자극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추구하라는 복음으로부터 탈선한 것이다. 설교라기보다 다단계 회사의 신입사원을 세뇌하기 위한 강의에 가까운 이런 방식의 설교가 반복되면, 그리스도인들은 파렴치한 행위만 아니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데 신자들은 강단의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 은혜, 성령 운운하니까 그것이 막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에 우리 강단의 심각성이 있다.

끝없는 자유경쟁의 구도가 전(全)지구적으로 고착화하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불안하다는 사실을 김 목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가 비록 남의 것을 직접 빼앗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부(富)라는 것이 결국 그걸 지켜낼 능력이 없거나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의 것을 간접적으로 약탈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복음이라는 명분으로 욕망을 충동질함으로써 한 인간의 영혼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샬롬의 영적 차원에서 개척해나가야 할 사회의 영성까지 파괴하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식의 설교 앞에서(『꿈』, 162) 나는 절망한다 ....

필자의 생각에, 한국교회 강단에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고 있는 "꿈은 이루어진다" 유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꿈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꿈만 있을 뿐이지 요셉의 꿈도 없고, 우리의 꿈도 없다. 유대인들에게 전승되어온 요셉 이야기는 우리의 계획과 의도를 뛰어넘어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전할 뿐이지 요셉의 신앙적 성실성이나 벼락출세를 다루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를 비롯한 상당수의 설교자들은 인생의 야무진 계획을 성취해야 할 신앙적 모티프로 요셉 이야기를 이용한다. 한쪽에는 요셉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청중과, 다른 한쪽에는 이런 청중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설교자들이 흡사 '악어와 악어새' 같은 공생관계를 구축하는 한 한국교회 강단에는 이런 사이비 설교가 결코 기세를 잃지 않을 것이다 ....

신념과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억울함을 백배로 갚아주신다는 주장은 특별한 상황에 처해 불안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위로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과도 어긋나는 진술이다. 순교자들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사람일수록 김목사가 어설프게 선전하고 있는 복 받음이나 행복한 조건의 성취와는 거리가 멀게 살았으며, 오히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실패를 의미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런 사실의 역사신학적 실증이다 ....

신자들의 사업이 성공한 탓에 "엄청나게 큰 교회를 지을 수 있는 복"을 얻었다는 말은 어느 벤처 기업가에게서나 들을 말이지, 설교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미국에서 한인 목회를 할 당시 엄청나게 큰 교회를 건축한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김 목사는 지금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당을 건축 중이다 ....

교회당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업적이라는 게 얼마나 하잘 것없는 것인지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을 신학박사 목사께서 자신들이 이룬 거대한 교회당을 단지 아름답다거나 보기에 좋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성과 일치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기발한 발상이다 ....이제 필자는 어느 정도 김 목사의 설교에 자리 잡고 있는 아마추어리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겉으로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뿐이지 실제로는 풍요의 신 바알의 전도자인 것 같다

윗글을 쓴 정용섭 목사의 설교비평서가 3권까지 출간돼있고, 그안에는 우리 사회의 유명한 목사들에 대한 꼼꼼하고 줏대있는 비평이 잔뜩 실려있다. 전에도 이 싸이트에서 정목사의 설교비평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고, 나는 정목사의 입장에 대부분 동의하며 그의 신앙과 학문을 존경하지만, 나는 정목사 보다는 정목사가 반대하는 오강남 교수의 견해에 보다 더 많이 찬동한다. 정목사는 오교수 수준의 '해체' 너머에 열리는 영성의 지평에 대해서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아무튼, 이 비평에서 정목사는 초거대교회의 통치자이며 한국 보수 개신교계의 거물이자 국제적으로 명망높은 목회신학자인 원로 김상복 목사를 무지한 사이비라며 가차없이 까버리고 있다. 나는 일전에 김상복 목사가 좌담 프로그램에서 진화론에 대해 대단히 무지한 이해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것을 보고 한국 개신교계의 반지성적 풍토에 대해 새삼 놀랐던 적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화려한 이력의 간판에도 불구하고 그 실상은 지적 파산상태에 가까운 사이비 '대가'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헌데, 정목사의 김목사 설교에 대한 비평을 읽다보니, 김목사와 같은 사이비 기복신앙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나 자신의 부끄러운 내면이 폭로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실은 나는 신의 복을 받아 세속적 행복을 왕창 누리고 싶은 욕심을 마음 한 구석에 꼭꼭 숨겨놓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범속한 인물이 신의 뜻을 구하고 전하는 메신저 역할을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가당치 않다. 적어도 나의 인간적인 판단력으로는.

하지만, 바로 그같은 범속하고 이기적인 소인배에게도 그런 소명이 맡겨질 수도 있다는 터무니 없어보이는 상상이 허락됨을 나는 기적적인 은총으로 받아들인다. 자기초월에 대한 그 허황돼보이는 믿음 자체가 나에게는 신께서 베푸신 기적처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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