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인연(2) (2008/5/5)

나의 조부께서는 6.25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나는 그분 얼굴을 사진으로만 뵜다. 조부께서는, 일제 때 민중 계몽과 독립정신 앙양에 주력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출판사를 경영하셨다 한다. 그래서 이따금 사료(史料)에서 조부의 성명과 조우하는 경우도 있었다. 몇 년 전, 집안 어른 한 분께서 그분의 초상화 한 점을 내게 맡기셨다. 관리를 잘해 보존하라는 분부가 담겨있었다. 헌데 나는 관리는 커녕 그 초상화를 벽장 속에 아무렇게나 세워둔 채로 까맣게 잊고 지냈고, 다른 물건을 꺼내다 그 그림을 긁어서 심각하게 훼손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제서야 깊이 반성하고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림 훼손은 이미 엎질러진 물. 그림을 고이 천으로 싸서 옷장 한 켠에 잘 모셔뒀지만 속이 매우 쓰렸다. 나의 조상님과 가문에게 죄스러워 그 이후로는 그 그림을 꺼내어보지도 못했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그 이후로는 매일 아침 기도중에, 얼굴도 못뵌 할아버지의 영혼에게 사죄의 말씀을 올렸다. 그리고 그분의 아우셨던 작은 할아버지의 영혼에게도 사죄를 올렸다. 대학교수셨던 작은 할아버지께서는 살아 생전 손자들 중에서도 특히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그러나 사죄의 기도를 매일 올린다하여 내 죄책감이 씻겨지지는 않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영혼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불가지론적 자세 밖에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어쨌든 죄스러웠다. 무슨 벌을 받을까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도 않은 조부, 집안 어른들의 기억 속에 밖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조부께 무작정 미안했을 뿐이다.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도 깊은 감정이 작용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유교적으로 선조의 영혼에 대해 전통적 예를 갖추는 인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책감은 지속됐다. 그렇게 몇 달을 조부의 영혼에게 용서를 비는 기도를 올리던 어느 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말 한 마디가 들려왔다: '네가 네 자신을 용서해주기만 하면 된다.' 숙고 끝에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 자신을 용서해줬다. 그리고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이런 게 다 내 마음이 만든 장난이건 아니건,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내 마음이 편해졌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소이연(所以然)의 한 부분으로서 내 조상의 역할에 대해 이전보다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어른들 표현을 따르자면, 철이 들어간다고나 할까.

얼마 전에 일 년 넘게 집필해오던 원고를 탈고했다. 그간 적절한 출판사를 탐색해오고 있었는데, '마케팅'에 역량을 보이는 젊은 출판사들 몇 군데를 후보 대상에 올렸지만 나는 내심 전통있고 고고한 출판사 쪽을 추진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명망있는 출판사 한 곳의 중진과 나의 아버지 사이에 과거에 친분이 있었음을 기억해냈다. 나는 그 출판사의 중진인 그 어른을 유아기에 뵌 기억도 있다. 그러나 그 출판사의 명성과 무게에 지레 겁먹었고, 또 그 어른과 아버지 사이의 최근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그냥 마음속으로만 잠깐 고려해보고 생각을 지웠다. 그런데 며칠 전, 함께 식사를 하신 뒤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조부의 출판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었다. 말씀인 즉슨, 조부의 출판사를 기리는 동판이 서울 시내의 과거 그 출판사 자리에 세워졌는데, 바로 그 사실을 그 명망있는 출판사의 지인께서 아버지께 알려주셨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께 도통 무슨 부탁 같은 것을 안하고, 재롱도 떨줄 모르는 무뚝뚝한 아들이지만, 이 순간은 마음을 고쳐먹고 아버지께 청을 드렸다. 그 출판사의 중진 어르신과 아직도 친분이 유지되고 있으시다면, 아들인 나의 원고를 출판을 위해 한 번 검토해주십사는 청탁을 드려주실 수 있으시냐고. 평소 당신에게 의존하는 귀여움을 보이는 일 없던 아들이 그리 청하자 아버지께선 내심 기쁘셨던가 보다. 바로 출판사의 그 어르신께 내 얘기를 전하셨고, 그래서 나는 내가 쓴 원고를 가지고 그분을 뵈러 찾아가게 됐다.

은퇴를 바라보고 계신 그 출판사 어르신을 뵙고, 편집부장도 뵙고, 원고에 대해 간단히 설명드리고 원고를 건넸다. 그 출판사의 중진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내 원고의 출판 가능성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지하게 검토의 대상으로 접수해달라는 정도의 '청탁'을 드린 것에 불과하여 실제 출판 여부는 미지수지만, 어쨌든 전통있는 출판사에 정식으로 원고를 제출했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공들여온 일 하나를 일단락지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출판사를 나설 때 그 어르신께서 내 조부 출판사의 기념동판 자리를 일러주셨다. 그분 설명대로 찾아가보니 과연 조부의 출판사에 대한 설명이 기록된 동판이 있었다. 번화가 인도에 설치돼있는 동판에 조부의 성함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수도 없이 들어본 출판사 이름이 새겨져있는 것을 보니 감회가 미묘했다. 헌데 동판의 일부에 오물이 묻어 있었고, 흙먼지도 군데군데 덮여 있었다.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마침 크리넥스 몇 장이 있었다. 그것들로 동판을 빡빡 문질렀다. 표면이 매끈한 재질이어서 종이로도 조금이나마 더러운 흔적을 없앨 수가 있었다. 조금 더 반짝이게 된 동판을 보며 얼굴도 못 뵌, 사진으로나 뵌 조부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하늘나라에 조부의 영혼이 계신지 어쩐지 알지 못하지만, 나지막히 기도를 올려봤다.

이 출판사가 내 책에 대한 출판계약을 해줄지 어쩔지 아직 모르는 나로서는 이번의 방문이 아무런 성과없는 시간 허비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조부와 연관된 인연의 끈들로 인하여 이 출판사까지 오고, 또 조부의 업적이 새겨진 기념판에 손을 대보게 된 것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에 불과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부께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바쳐 무언가 의미심장한 행위를 펼치셨고, 그것이 나중에 역사책 한 귀퉁이의 문장 몇 개와 저자거리의 자그마한 동판이라는 흔적으로 이 세상에 남았기에, 그 동판을 목격하신 출판사 어르신이 나의 부친께 그 사실을 전언하였고, 그래서 내 아버지께서 내게 그런 일들에 관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날 내가 그 출판사를 방문하고, 또 기념동판을 찾아가서 닦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연의 의미는 내가 지금 다 파악할 수 없지만, 세상속 사람들의 인연의 고리의 비밀스러운 의미에 대해 상상해보건대, '하느님께서는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역사하신다'는 기독교 사제들이 흔히 하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더 이상 제대로 격식을 갖춘 유교식 제사도 올리지 않은 후손이지만,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삶에 대한 나름의 뜻을 품고 살아가고 있기까지 나의 선조들이 행사한 영향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음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내게 내려오는 인연의 끈이 특별한 유전자적 연결고리일 뿐일지, 영혼의 연계일지, 나의 비좁은 머리로 알 수는 없지만, 그 인연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 것이 카르마이겠다. 나도 지금 여기에서 나의 카르마를 생성하고 있을 게다. 그것이 내 딸들에게, 내 후손들에게 연계될 것이다. 내가 여기에 함부로 괜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 연계성과 인연과 관계를 숭상하는 것이 유교적 제례의 의의일 것이다. 그저 죽은 이의 귀신이 있거니 없거니 하는 수준의 논의에 치우쳐 유교적 제사를 '조상 숭배'로 규정하는 것은 조상에 대한 제의의 존재론적 의미의 수준에 대한 상상을 막아버린다. 제의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있게 한 인연의 고리에 관해 성찰함으로써 우주의, 신의 섭리 앞에 자신을 낮추고 절하는 행위에는 깊은 존재론적 의미가 내포돼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숨쉬고 있다는 사실의 의미에 관해 반추해보는 성스러운 기회를 가질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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