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으로서의
나 (2008/11/17)
©
Suk Hoon Han
'나는
우주에 대한 하나의 질문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됐다.' 이것은 융의
추측이다. 입증할 길이 없어서 나는 '추측'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이것이 융의 깨달음이고 믿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믿음에 강하게 동조한다. 즉, 내가 태어나게 된 이유가, 나의 삶을
통해 하나의 질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였었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내가
그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구할 것으로 반드시 믿지는 않지만,
내 삶이 그 질문에 대한 풀이 과정임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본질적인
삶이라고 본다. 왜 나는 융의 이런 믿음에 동조하는지를 글로써 설명하는
것은 길고도 어려운 작업이 될 것 같아 일단 생략한다.
요즘
몸에 불편함이 있어 심한 운동을 자제하는 대신, 출근길에 사오십 분을
걷는다. 이 시간이 나로선 하루 중에 가장 깊은 성찰에 잠길 수 있는
순간이다. 약 삼십 분 가까이 개천 옆 자전거 길을 걷는 것은 일상의
축복이다. 하늘과 물과 갈대와 나무를 보며 걷는다. 걸으며 되물었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나의 질문은 무엇인가?
아마도 이것일 것
같다: '인간의 삶은 살만 한 가치가 있는가?'
이것이 내 삶에
배정된 질문인지 완전히 확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 세상에 그런 건 없으니까
-, 아무래도 이것인 것만 같다. 나는 이십오륙 년 전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성적으로 내렸었다. 내 답은 '살만 한 가치가 없다'였다. 그때
나의 알량한 성능의 이성은 이런 답에 이르렀다: 삶이란 무의미하거나,
혹은 내가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연유로 인해 유의미할 수도 있을 터인데,
설사 후자가 맞다 하더라도, 그게 대체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때 나는 죽음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그게 답이 아니었다. 그 답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니라
-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모르니까 -, 그 '답'은 질문하기를 중단시켜버리기
때문에 답이 아니라는 말이다. 논리는 죽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개천 옆길을 걸으며 나의 질문을 다시금 제기한다: 삶이 살만 한 가치가
있는가?
둘째 딸 나나가 제 친구에게서 강아지 한 마리를 빌려왔다.
친구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며칠 간만 맡아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두
딸들은 그 강아지에 환장해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 슬하(?)를 떠나 낯선
집에 적응하며 삶을 지속하는 그 강아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놈에게 만약 자비로운 주인이 없다면, 저 어린 놈의 견생(犬生)은
얼마나 험난할꼬... 고해(苦海)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만 하는 중생에
대한 이러한 측은지심은 제 자식들에게 가장 극명하게 적용될 것이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내 딸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로 그같은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저 애들이 앞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나의 벗은 자식들에 대한 이런 감정을
'아릿한' 마음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벗의 경우, 그의 부친께서 돌연사하시기
직전에 아들을 앞에 두고 펑펑 우셨다고 한다 - 아들이 앞으로 험한
세상을 어찌 헤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걱정으로.
측은지심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살만 한 가치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이것은 머리의 사고 이전에 직관적으로 뛰쳐나온 답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사단(四端) 중의 인(仁)에 대응하는 마음 작용이 측은지심이다.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신의 법리의 증거가 바로 연민하는 마음이다.
나는 연민이 사랑의 중요한 양상이라고 생각한다. 죽은 논리를
살려내보자면, 인간의 삶이 살만 한 가치가 있는 이유가 사랑에 있다는
말이 된다.
싱겁고도 엉성한 답이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답이라고
믿는다. 질문은 계속된다. 나 자신이 하나의 질문으로 세상에 주어졌기
때문에 나는 질문을 계속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