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공존 (2008/6/16)
©
Sukhoon Han
나는
원체 마음이 여리고 동정심 많은 사내애였다. 나는 그것을 그 자체로
'善'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만약 그것이 나약함으로 표출된다면, 전쟁터에서
무기력한 병사가 돼 버릴 수 있고, 이는 '선,' 즉 'good'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측은지심이 많은 것이 그 자체로 선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약함이 아니라 굳건한 정신으로 뒷받침된다면 선이 될 수도 있겠다.
내가 강한 의지로써 내 안의 측은지심을 이타적 행동으로 표출시켰던
적이 있었던가. 그런 자랑스러운 기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랑할
만 한 기억도 변변히 없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그래도 제 딴에는
측은지심으로 내 삶의 엔진에 시동을 걸고자 용기를 냈던 적도 있다. 나는 11세 경에 독서와 고아원 방문을 통해 세상의 가난에 눈을 뜨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다니던 사립학교의 배금주의적 분위기에
대한 반발심으로 머리를 스포츠 스타일로 밀어버리고, 도시락 반찬으로는 무말랭이
한 가지만 넣어가지고 다녔다. 치기어리고 어리석은 반항 행동이었지만
그런 '나'를 지금의 나는 이해해준다. 그런 행동이 측은지심에서
발동한 것임을 안다.
그런데 측은지심 많은 인간인줄 알았던 내가 지극히
사악하고도 냉혹한 생각을 품었던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주길 바랬던 것이다. 원한에 사무친 것도, 극도의 증오심을 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나의 알량한 편의를 위해서 그런 바램을 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악마를 봤다. 악마는 끔찍한 괴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해버릴 정도로 무정한,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자체로 충분히 좌절스럽다. 그러나 더욱 좌절스럽게
만든 것은, 측은지심 많다고 여겼던 평소의 나 자신과 내 안의 악마
사이의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간극이었다. 단순히 '내 안에는 선·악이 공존하고 있다' 정도의
표현으로 이 간극을 설명할 수가 없다. 지선(至善)과
극악의 모순이 내 안에 함께 들어앉아 있음을 봤을 때, 나 자신의 인간됨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선악의 모순 덩어리인
나 자신을 나는 수용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 하루를 보내며, 또 살아남을 궁리를 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아니, 아무 상관 없었다. 용서 안해도
내 생존본능은 자동적으로 작동되고 있으니까. 내 안의 모순의 거대함에
놀란 나는 인간 이하로 하루, 또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준 것이 신의 손길이었다. 신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은 내 안의 사악함의 거짓됨이었다. 내 안의 측은지심의
주인됨, 참됨이었다. 나는 신의 가르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두뇌의 힘만으로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내 안의 악마는 그림자이고 환영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신앙이 생긴다. 신과 연결된 내 안의 참됨에 대한 신앙이 생긴다.
나의 수행은 그 참된 나를 삶속에서 밝히고자 하는 방편이다. 나의 교육관은
참된 자신을 밝히는 것을 도와주는 보편적 방법의 모색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그것이 초심이었고 오로지 그것이 내가 향해야 할 길임을 잘 안다.
돈과
일 등등의 번쇄한 현실 속에서 내 중심을 망각하지 않고자, 한
번 요점 정리해봤다. 이런 '요점 정리'는, 신의 뜻에 나를 내맡긴다
해놓고서도 현실의 자질구레한 유혹에 매번 흔들리는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