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vs. 변화 (2008/8/4)
©
Sukhoon Han
'현실'이란,
그것에 대해 방관한 채 아무 일도 안하고 있을 동안 그대로 존속된다.
돈 벌어서 아파트 평수 늘리려고 바쁘게 사느라 민주주의의
퇴행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을 때, 반(反) 민주주의적 사회문화라는
현실은 그대로 존속된다. '변화'란,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를
써서 노력한다 할지라도 지극히 느린 속도로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전태일의 분신도 민주화를 획기적으로 촉진시키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언제나 '현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 란 헛된 이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년,
십년, 삼십년, 또는 백년의 세월을 조망해보라. 우리가 그렇게 철썩같이
변화하지 않으리라 믿어온 철옹성과도 같은 '현실'이란 허구에 불과했고,
세상은 실제로 늘 변화해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유신독재도
스러졌고, 5공 폭정도 무너졌으며, 민주주의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상이라는 헛된 '현실'에 함몰되어 이
엄연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사람의 비좁은 시야다. 나 하나의
투표권 행사가 우리 사회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으니, 그냥 있는 대로 '현실'을 인정하며 편하게
살 도리밖에 없다고 믿는 것이 - 아니, 변명하는 것이 - 우리의
비좁은 시야다. 변화가 세상만사의 진면목일진대, 끝까지 자신의
목전에서 순간적으로 명멸하고 말 '현실'만 붙잡고 늘어지는 삶이야
말로 얼마나 불쌍한 삶인가?
변화의 큰 흐름에 내 전부를 내맡김으로써
나의 영적인 삶이 시장의 금리(金利) 보다는 커다란 세상의 순리를 따라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신앙생활'이 제공해줄 수 있는 본질적
도움이겠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인간을 위하고자 하는 숭고한 이상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흥했는데, 나는 그것들의 뿌리에 '신앙'에 근접하거나
신앙과 일치하는 위대한 영적 각성이 자리잡고 있음을 관찰한다. 그러나
이런 이상들이 쉽사리 세상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세상을 변화시킨
예는 결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들은 마치 그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생물학적 진화의 계통수와도 같이, 긴 세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이타주의, 인본주의, 인도주의, 민권사상,
민주주의, 개인의 인권수호론, 전인류적 동지애 등등과 같은 이상들은
대단히 적대적인 역사적 정황들을 뚫고 지금까지 이어져왔으며, 인민구휼기관이나
민주공화정과 같은 그 구체적 실행체계마저 다채로운 형태로 건설해왔다.
우리네 일상적 삶 역시 그러한 긴 역사적 흐름의 한 부분에 위치해있을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는 것을 '역사의식'이라 부를 수 있겠다.
'현상계'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본질'적 차원의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신앙인이나 영적
수행자가 '현상'의 흐름으로 보이는 인간세상의 역사에서 삶의 의의를
모색하는 것이 모순된다고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영적 본질에 충실한 인간이 자신의 '이웃'인 인류, 중생의 장기적 복지와
안녕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록 그 관심이 어떤
구도자의 경우에는 입산수도와 지극히 개인적인 기도의 형태로 드러난다
할지언정, 그 관심 자체를 부당하다 할 수는 없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소수의 기득권 계층을 지나치게 우대함으로써 대다수의 서민 계층을
소외시키고, 이같은 정치노선을 근본주의적이고도 기복주의적인 개신교
교단과 영합하여 추진하고 있는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고, 이처럼 오도된
위정자 옹호와 소수계층의 이권수호에 과도하게 집중하고 있는 조·중·동
'보수' 언론에 반대하는 한 편, 현 정권에 대해 비판의 기치를 올리고
있는 일부 천주교 사제들과 개신교 목회자들, 그리고 불교 승려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올 여름, 폭염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전개 덕분에 때아닌 역사공부를 한 달 동안 열심히 하는 도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수'와 '참여'를 이분법적으로 평가하시는 수행자
분들께는 (수도 정진해야 할 수행자가 현실 정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보는 분들께는) 이 글로써 나의 답변을
삼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