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대한 안도감 (2008/3/24)
©
Sukhoon Han
경기도
안양에 연구실이 있고, 그 부근 도시에서 두 딸을 키우며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이번의 혜진이, 예슬이 살해사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관찰해왔다. 나는 이 사건의 범인을 '찢어죽여야 한다'는 감정적인 여론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싸이코패스'의 발생 원인에 관해 범죄학자나
의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연구해봐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 이제부터라도
보다 더 현명하게 우리의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같은 엽기만행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싸이코패스라 지칭된 범죄자들을
단순히 사형시켜버리지 말고, 아까운 세금 들여서 무기한 감금해놓고
심도있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는 냉정한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찢어죽이자'는 시민들의 분노에 가득찬 음성을 들으며 묘한
안도감을 맛본다.
사람들은 어린이 성폭행 살해사건과 같은 '천인공노할'
뉴스를 접하며 분노에 떤다. 그건 나도 똑같다. 그런데 만일 내가 인터넷
포탈 싸이트에 로그인까지 해서 '저놈을 죽이자!'며 그런 분노를
세상에다가 표출하게 된다면, 분노로 포장된 그 표출 행위의 밑바닥에는
일종의 안도의 기분이 발생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개인적으로 손꼽는 걸작인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유괴범에
의해 딸을 살해당한 피해자를 담당한 형사가 아내에게 전화 통화를 하며,
자신들은 돈이 없으니 자식 유괴당할 걱정은 없지 않느냐는 자조적인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그런 안도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 딸이 그런 일 안 당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그런 범죄 소식을
접하면 안도감은커녕 더 큰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게 자식 키우는 부모
심정이 아닐까 싶다.
내가 말하는 안도감이란, 어린애를 무참히
살해한 극악무도한 범행에 대해 이처럼 공분하고 있는 '우리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음으로써 피어오르는 감정을 지칭한다. 내가 이상한 인간이라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인터넷 뉴스에 달린 '저놈을 찢어죽이자'는
수많은 댓글들을 읽으며 그런 안도감을 미세하게 느꼈다. 범인을 야만적으로
응징하자는 장삼이사들의 그 댓글들을 읽으며 내가 숨어서 안도하는
이유는, 평소의 삶속에서는 이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어린이들의
죽음에 공분하고 슬퍼할만큼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이들이라고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자기 잇속 챙기기에
바쁘고, 어떻게 하면 남들을 앞질러서 경쟁에서 이길 것인가에만 혈안이
돼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마치 우리 사회인 것처럼 생각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그런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엽기 살인 사건의 뉴스는, 이처럼 우리가 함께 분노에 떠는
경험을 통해, 실은 우리가 본래는 통합돼있는 존재라는 진리에 대한
실마리를 간신히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물론
흉악범이나, 공분하는 시민들이나, 안도하는 나나, 다 생물학적으로
동일하고, 영적으로 원래 통합돼있는 존재일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흉악범과 같은 극단적 국외자를 대다수인 '우리'로부터 분리시켜 놓는
것이 가능해질 경우, '우리'는 최소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통합돼있음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아, 우리는 워낙엔 이렇게 생명을 존중하고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가슴 깊숙한 곳에 품고 있던 이들이었구나!'
나는
영적인 통합과 같은 거창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사회문화적으로라도 통합돼있음에 대해서도 이런 끔찍한 일을
접해서야 간신히 느낄 수 있다는 우리의 현실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다.
* 억울하게 희생된 혜진이와 예슬이의
명복을 비오며, 그들 가족의 고통을 신께서 불쌍히 여겨주시옵기를 기원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