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효도여행, 기차여행 (2008/3/10)

나의 장인께선 칠순을 넘기신지 여러 해가 지났고, 장모께선 얼마 전 칠순이 되셨다. 두분이 지난 몇 해 동안 재정적으로 어려운 일에 연루되어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던 탓에 칠순 잔치도 원치 아니하시어, 별 행사도 없이 때를 놓쳐버린 채로 있다가, 차제에 자식들이 섭섭하다 하여 두분을 모시고 짧은 여행이나마 다녀오게 됐다. 장녀의 사위인 내가 인솔대장이 되고, 일 때문에 짬을 내지 못하는 큰 처남 대신에 작은 처남 식구가 동행하게 됐다.

강원도로 3박4일 여행을 떠나게 됐는데, 궁리 끝에 처남의 11인승 승합차에 전원이 탑승하기로 했다. 차 한 대로 다니는 게 편리할 뿐 아니라, 고유가 시대에 휘발유 값 등등도 현저하게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착한 처남은 낑낑대며 많은 짐들을 차의 천정 위에 달아 맨 카고에 쑤셔 넣었고, 9명의 일행은 차 안에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악의 좌석이 맨 뒷칸이었는데, 아이 2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에다, 창문이 매우 작아 밖의 풍경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그곳에 나와 내 첫째 딸 시시가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일행 중에서 우리 둘이 가장 차멀미에 강하고, 튼튼하기 때문이었다. 장인, 장모님 다음의 '서열 3위'인 내가 맨 뒷칸에 찌그러져 가는 것에 대해 일행은 미안함을 표명했지만,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첫 날을 양양의 오색약수 부근에 물색해둔 펜션인 '오색연가'에서 묵었는데, 이 펜션은 기록해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광고해줄 만 한 곳이다. 남설악 주전골에서 내려오는 계곡 바로 앞, 말이 필요없는 청정 지역에 주인장이 직접 지었다는 투박하지만 개성있는 목조건물로 이루어진 이곳은 단순히 맑은 공기와 자연을 즐기기에도 좋지만, 나무로 된 집 자체가 꽤 매력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다른 곳들에 비해 숙박료가 싸다. 주말에 우리 일행 9명이 20만원을 주고 특실 한 곳에 묵었는데, 15명이 묵는다 해도 공간이 넉넉할 정도로 쾌적하고 안락했다. 주인장 내외분도 친절하니 더 바랄 것 없다. 우리는 펜션 뜰의 바베큐 시설에서 고기를 굽고 군고구마를 구어먹으며 행복한 첫날 밤을 보냈다. 추운 겨울 밤에 캠프 파이어를 하며 저녁밥을 먹으니 아이들이 제일 즐거워 했다.

아무리 시설의 가치에 비해 저렴하다 했지만, 하루를 넘겨서 묵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어서 우리는 다음 날에 양양의 대명콘도로 이사를 갔다. 비록 방은 비좁아졌지만 새로 지은 깨끗한 시설에서 겨울바다를 보며 편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온천 수영장에서 온종일 놀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선 그런 아이들 보시며 즐거워 하셨으니, 돈과 시간 들여 거기까지 함께 간 보람이 있었다. 나는 물놀이 보다는 산을 좋아하시는 장인을 모시고 부근의 낙산사에도 다녀왔는데, 몇 해 전 화마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아름다운 동해의 풍광을 끼고 있는 명당의 품위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어 충분히 사찰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시시와 둘이 일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태백선 기차를 타고 귀경하기로 결정했다. 차 뒷 좌석이 불편한 것보다도, 딸내미가 긴 드라이브 시간 동안 밖의 경치도 전혀 못 보는 게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둘째 나나는 나머지 일행들과 차를 타고 집으로 가라고 보내고, 나와 시시는 강릉역에서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표를 샀다. 일행은 함께 밥 사먹고 놀며 동행하기를 원했지만, 딸에게 기차여행 맛을 보여주겠다는 나를 말리지는 못했다. 실은 나는 예전부터 태백선 기차 여행을 혼자 할 계획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가족들을 떠나보내고 강릉역에 단 둘이 남은 나와 시시는 열차 출발인 오후 2시까지 시간이 남아돌아서, 둘이 손 잡고 강릉 시내 탐사에 나섰다. 정처없이 강릉시내를 걸으며 그곳 사람들 삶의 모습을 구경하고, 찌그러져가는 향교도 기웃거리고 하다보니 역에서부터 한참 먼 곳까지 와버렸다. 시시가 다리 아프다 투덜대서 선심 쓰는 척 택시를 타고 역전으로 돌아와서는 허름한 칼국수 집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자그마한 식당에는 이웃 가게의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들 있었는데, 식당 한 구석의 오래 된 텔레비전은 고장이 나서 화면은 안 나오고 소리만 들리는데도, 그 아주머니들은 마치 재미난 연속극 시청하듯이 그 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는 강원도 스타일로 감자가 잔뜩 들어간 칼국수를 싹 비웠다.

강릉에서 청량리까지 오는 데 6시간 반이 소요됐다. 단선 선로로 강원도 산간을 지나면서, 앞에서 열차가 마주오면 잠시 멈췄다 가기를 반복하고, 험준한 산을 스위치 백이라는 지그재그식 운행 방식으로 겨우 겨우 넘기도 하다보니, 강원도를 빠져나오는 데에만 5시간이 족히 걸렸다. 동해안의 절경과 강원도의 선경을 감상하며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지만, 아무래도 이제 6학년 올라가는 시시에게는 조금 지루한 여정이었던 듯 했다. 나는 노트북 컴퓨터를 아이에게 앵겨줘서 이어폰도 끼워주고는, 자기가 좋아하는 가요 MP3 파일도 듣고, 저장된 애니메이션도 한 편 보게 했다.

나는 창 밖만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6시간이 아니라 12시간도 그렇게 창밖만 보고 가도 좋을 것 같았다. 태백과 정선 탄광촌의 회색빛 을씨년스런 풍경은 수십 년 전 그곳을 지났을 때와 다름없었다. 사람들은 차갑고 축축한 그곳에서 저렇게 힘들게들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황금 페인트로 도배를 한 듯이 돈 냄새가 골짜기에 푹 배버린 강원랜드 카지노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인간들의 탐욕이 커다란 자연을 더럽힐 수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곳에 도박장을 꼭 만들었어야 했을까? 이른바 '경제 논리'라는 것... 그쪽 동네는 괜스레 인심도 사나울 것만 같았다.

육십대로 보이는 노인장 한 분이 나의 대각선 앞 쪽의 창가 좌석에 앉았다. 그 옆 자리에는 사십 쯤 됐을까 싶은 아낙이 앉아 있었다. 내 짐작으로는 노인은 여행자였다. 혼자 여행 다니는 부류의 사람은 보면 티가 난다. 그 양반은 자리에 앉더니 옆 좌석의 여인네에게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강원도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의례적이고도 인간적인 인삿말이었다. 헌데 그 여인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뒤에서 보기에도 마치 치근덕대는 늙은이가 귀찮다는 듯한 몸의 태도가 역력했다. 노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도 않은 채 그 여인은 이내 다른 빈 좌석으로 자리를 옮겨가버렸다. 그 노인은 얼마나 기분이 잡쳤을까? 이런 말은 하기에 미안하지만, 그 여인네의 겉모습에서 물장사 쪽 분위기가 묻어났다. 어쨌든 나중의 역에서 잔여 좌석의 주인들이 탑승하게 되자, 그 여인은 별수없이 자신의 본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나는 그 노인이 다시 여인에게 말을 걸거나, 아니 아예 여인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는 것을 그 후로는 보지 못했다.

서울이 다가오자 노인은 핸드폰을 꺼내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객실 안이어서 조용한 음성으로 통화했지만 뒤의 내게는 그의 말이 다 들렸다. 오늘 저녁에 평양에서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하는 걸 텔레비전에서 중계해줄 테니 꼭 보라는 얘기를 부인에게 했다. 그의 말씨를 들으며, 나는 그가 아마 교수나 교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열차가 팔당을 지났을 때 쯤, 그 여인이 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 말이 아니라 뭔가 음식을 건넨 것이었다. 시장하실 텐데 하나 맛보시라며. 서너 시간 전과는 달리 매우 공손한 태도로 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은 눈길도 한 번 옆으로 돌리지 않은 채 정중하게 거절했다. 여인이 재차 권했지만 노인은 세차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뒤에서 보기에도 노인이 여인의 박대에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여인은 별 도리 없이 꺼냈던 음식을 봉투 속에 주섬주섬 도로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와는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채 종착역까지 갔다.

세상만사가 참으로 복잡한데,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개인적 차이와 무관하게 쉽게 벗이 될 수도 있건만, 세상으로부터 입은 상처때문에,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가 보다. 나라 해도 내 옆 자리의 여인한테 친절한 말을 건넸다가 치한 취급을 받으면 열받아서 마음을 닫아버렸을 게다.

사람 보고, 풍경 보는 기차 여행이 나는 그저 좋았지만, 저녁7시 쯤 되니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창밖 풍경도 볼 수가 없게 된 것이 아쉬웠다. 우리는 밤 열시가 다 돼서 집에 도착했다. 기찻간에서 저녁을 안 사먹고 군것질만 했기에 집에 와서 치킨 배달 시켜다가 맥주 한 잔에 무사히 여행 다녀온 것을 자축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사했으되, 우리의 자동차는 그러하지 못했다. 처남의 차로 함께 가느라 우리 차를 처가댁 아파트 단지의 지하 주차장에 두고 여행을 떠났었는데, 아내가 그 차를 집으로 가져오느라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기둥에다 대고 심하게 차체를 긁어버린 것이었다. 일부러 부순 것도 아닌 것을 화를 낼 수도 없고... 긁힌 차체를 보며 내 속은 쓰렸지만, 애써 담담한 듯 아내를 위안했다.

"거봐, 세상살이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데 우린 똑똑한 척 계산하면서 살잖아. 돈 몇 푼 아껴보자고 고생스럽게 차 한 대에 구겨타고 갔다왔는데, 결국엔 그 돈 보다 훨씬 많은 수리비만 깨지게 됐네. 세상이 원래 그런 겨. 속상해 할 거 없다니까. 살다보면 계산이 빗나가고 손해도 보고, 뭐 그런게 사는 거 아닌가."

십여 만원 아껴보려 했었거늘, 차 수리비를 보험료로 돌렸지만 결과적으로 20여만 원 이상 손해를 보게 됐다. 하지만 큰 딸과 소중한 기차여행을 한 경험을 어디 돈으로 따질 수야 있겠는가. 노인네 두 분과 이이 셋을 데리고 별 탈없이 잘 놀고, 잘 먹고, 행복한 시간을 누리고 왔으니, 오직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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