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최상 (2008/6/8)
©
Sukhoon Han
사람들에게는
다 자신에게만 맞는 삶의 길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공연히 자신과
어울리지도 않는 그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할 것 없다. 나
자신으로서 있으면 된다. '성자(聖者)'가 되려 애써봤자 말짱 헛 일이다.
그저 성자인 나 자신으로서 있으면 된다. 나 자신의 성자됨을 의심케
하는 세상의 장치들이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할 때, 나는 성자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삼십오 년쯤 전에 읽은 어떤 먼 나라의
설화가 떠오른다. 한 나라의 고귀한 왕자와 저자거리의 근면한 재단사의
운명이 엇갈려, 재단사가 왕자의 자리에 앉게 됐으나 곧 자신의 그릇을
깨닫고 재단사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왕자는 권좌에 복귀한다는 이야기였다.
일종의 신탁, 또는 사주팔자와도 같이 둘에게 주어진 인생 지침이 있었는데,
왕자에게는 '명예와 영광'이, 그리고 재단사에게는 '행복과 돈'이 주어졌었다.
어느 쪽이 더 좋거나 나쁠 것이 없다. 그저 자신의 그릇을 찾아 사는
쪽이 옳을 뿐이다.
나의 그릇이 순교자나 성자의 그것이 아님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긴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영광' 같은 것보다는
'행복'을 더 좇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런데도 거의 십 년 전에 겪은
신비체험 이후로는 부지불식간에 성자가 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노력들은 다 처절히 부서졌다. 왜? 성자는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성자로서 있을 뿐이다. 아니, '성자'고 어쩌고
하는 틀 자체도 없이. (신 체험 이후에 나는, 신께서 내가 성 프란치스코
같은 성자와 닮은 삶을 살기를 기대한다고 생각했었다.)
노력해도
성자가 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성자로서 있을 수가 있을까.
요즘,
얼마 전에 자전거 타기를 다 배운 어린 딸과 함께 자전거를 한
대씩 타고 곧게 뻗은 길을 질주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 삶속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나는 그 이상의 어떤 행복을 떠올릴 수가
없다. 아직 조금은 위태롭게 질주하는 딸의 자전거를 옆에서 따라가며, 나는
딸의 운전을 관찰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해 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조금도 걱정이나 우려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너무도 행복하게 몰입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딸을 주시하는 일에
몰입해 있는 나는 때때로 아이에게 조금 위험한 주행도 권유한다.
그래서 아이가 쓰러지고 다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는 곧 일어나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나의 딸이 당당히 자전거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사람들 눈앞에서 자랑스럽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나는 내 딸이 학교에서 큰 상을 받아온 것보다도, 맑고 밝은
얼굴로 신나게 자전거를 달리는 것이 더 자랑스럽기는 하다. 허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고, 나는 신 앞에서 자랑스럽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께서 내 역량의 최대한을 발휘하기를 기대하는 그만큼을
내가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실천함이, 사랑의 존재로서 있음이 신께서 내게 기대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내가 견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절대적 믿음 중 하나다.
위대한
지도자의 명예나 순교자적인 영광이 아니라, 제 그릇에 맞는 소명을
따라 사는 행복과 그런 자그마한 삶을 꾸려가는 것('돈')이 나에게
어울리는 팔자소관이라는 점을 안다. 그것이 '쁘띠 부르조아'의
이기적 천박함이 될지, 아니면 내가 속한 시·공간 속의
빛과 소금됨을 드러내는 것이 될지는 철저히 내 스스로, 내 방식으로써만 밝혀낼
바이다. 내 딸이 세상에 행복한 웃음을 건넬 수 있도록 자전거를 함께
타는 애비의 역할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우길 것이다. 내 학생들의 마음 밭에 아주 조금이라도 희망의 씨를 뿌리는
선생의 역할도 후자에 속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할 것이다. 그런 것들을
하는 나는 사랑의 존재다. 다만 사랑의 실천에도 실패와 좌절이 도처에
있다는 점은 변명으로 꿍쳐놓고 있다.
사랑은 나의 최고의 존재
상태다. 사랑으로 있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진정한
나 자신으로서 있으면 된다. 헌데 그게 이 세상에서는 잘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한 때 영적인 순례에 몰입했던 구도자였던 애플 사의
설립자 스티브 잡스는 이런 조언을 준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프지 않고, 바보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신의 존재라는 절실함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을 따르지
않고 바보같이 진정한 자신으로서 삶속에 존재하기를 절실히 간구하는
이는 반드시 자신의 최상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잡스와 같은
고수의 조언에는 필히 경청할 보물이 숨겨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