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2009/11/7)
 

© Suk Hoon Han                                                                                                                                                                                
 
 

사십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이즈음의 벗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심신의 노화를 토로하곤 한다. 노후 대책 이야기들이 나온다. 나도 무릎이 안 좋아 예전처럼 산속을 설치고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철이 안드는 것일지, 아직도 이루고 싶은 '프로젝트'들에 대한 꿈을 꾸느라 늙을 겨를이 없다. 물론 하고 싶은 공부와 쓰고 싶은 책들도 많은데, 그런 일은 대체로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를 벗어난 영역에도 프로젝트들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일에는 돈이 좀 필요해서 일단 십수 년 이상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훗날, 아파트 촌을 떠나 교외로 이사가서 작은 단독주택에다 기술적으로 정교한 전자 피아노를 장만하고 싶다. 일종의 원맨 오케스트라를 만드려는 심산이다. 편곡하고 작곡한 것들을 미디 파일로 변환해서 웹 컨서트 홀을 꾸려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이 일을 꿈 꾸는 것은, 이 나이가 돼서도 여전히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때 내 혼이 춤추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피아노를 쳐보면, 내 마음을 소리의 선율과 리듬에 싣는 것이 글에 싣는 편보다 수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돈도 안되는 사치스러운 취미 활동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걸 안 해보고 죽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

나는 해가 가면 갈수록 '나'로서 살아야겠다는 뜻이 굳어진다. 그러다보니 그 뜻의 한 귀퉁이가 거의 심리적 콤플렉스化 했는지, 무의식적으로 '남들의 뜻'에 대해 저항하는 부작용마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대박' 흥행 영화는 한 편도 안 본다든지, '대세'라는 유행에 대해서는 일단 등을 돌리고 본다든지, 하는 식의 유치한 부작용 말이다. 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학자라든가 교육자상이 나 자신에 덧씌워질 것을 두려워하는 유치한 심리적 부작용 따위라든가. 해가 갈수록 먹고 산다는 대명제의 거룩함과 위대함을 수용하게 되지만, 역설적으로 해가 갈수록 먹고 살기만 하다가 갈 수는 없다는 각성은 또렷해진다. 그럼 대체 뭘 하다 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응답은 이 웹싸이트에서는 이미 지나치게 진부해졌지만, 아무튼 세상이 제공하는 쾌락을 다 누리다 가는 쪽일 수는 없고, 원래 부여받은 '나'라는 고유한 존재의 본질을 다 써먹어보고 가는 쪽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나는 왜 중년에 다다라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 그 원인은 다양하고도 복잡한 것 같다. 그 최초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성장과정일까, 나의 유전자일까, 나의 전생일까? 나는 그 모든 것들, 내 두뇌로 상상해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의 궁극적인 최초를 '신'으로 간주한다. 이것이 나만의 종교다.

저 아득한 최초의 원인에서 시작된 기나긴 인간-인류의 삶 속에 의미를 불어넣는 작업으로서 교육이라는 영역이 있다. 그 교육의 동시대적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나의 학문적 정체성이었다. 그런 연구가 공식적으로는 과학을 표명하면서도, 모든 아이들이 높은 자긍심을 지니고 높은 학업 성취도를 달성해야 한다는 일종의 교리에 사로잡혀 있음을 본다. 나는 그 교리가 수용하지 못하는 '예외'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 예외에는 나도 포함된다. 나는 낮은 자긍심과 낮은 학업 성취도를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높은 성취도를 달성한 적도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자긍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내게는 성적 따위 보다 더 중요한 당시의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예컨대 12살 때에는 자전거를 타고 도시의 가장 먼 곳까지 가보는 것이 더 중요했고, 마징가 제트라는 만화에 등장하는 고대 미케네 문명이 과연 거대 로봇을 갖고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같은 성장 과정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인들 중의 하나다. 물론 지금의 '나'가 성공했다거나, 잘 났다거나 그런 말이 아니라, 그저 '나'로서 있고자 하는 뜻을 더 굳혀가는 종류의 인간이 돼있다는 말이라는 점을 굳이 부연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로서 사는 다양한 길을 작동시키기에는 요즘에는 강의의 양이 과다하다. 다섯 가지의 과목을 그보다 많은 클래스를 상대로 강의하는데, 단 한 클래스도 '놓치기 싫은' 욕심 때문에 그것들 준비하느라 한주일이 정신없이 가버린다. 자나 깨나, 길을 걸으나, 지하철을 타거나, 끊임없이 강의 내용에 대한 새로운 궁리를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문득 발견하곤 한다. 그러다보니 집필중이던 책 원고에 복귀도 못하고, 그밖의 다른 일에도 신경을 못 쓴다. 내가 지금 이렇게 강의 준비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에도 다 합당한 원인이 있을 것으로 안다. 거기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다. 지금의 내 처지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해야만 하는, 하고 싶은 모든 것들에는 그에 합당한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부정하거나, 그래서 내게 주어진 숙명을 거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감사로써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아는 유일하게 합당한 선택이다. 나의 이런 결론을 심오하게 지지해주는 융 사부의 견해를 한 신학자의 책에서 읽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 여기다 베껴 놓는다.


융은 성서에서 개인적인 위로와 격려를 발견했다. 곤란할 때 그의 상태에 도움을 준 한 구절로서 욥기 5장 18절의 "찌르고 나서 싸매 주시며, 때리고 나서 낫게 해 주시는 이"를 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가장 괴로웠던 시기에 이사야서 35장이 일을 계속할 용기를 주었다고 한 친구에게 털어놓고 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내 기쁨을 꽃피워라."

낙원의 아담 이야기도 융의 젊은 시절에 도움이 되었다. 한때 마음속에서 "믿어지지 않는 사악하면서도 모험적인" 생각을 제거하려 해도 할 수 없어서 그는 고생했다. "왜 믿어지지 않는 사악한 것을 생각해야 하는가? 어쨌든 이러한 생각은 어디서 오는가?" 하고 물으며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대로 세상에 태어났다"고 숙고했다. 아담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자신의 경험과 유사함을 알았다. "전지하신 하느님은 인류 최초의 조상이 죄를 범하도록 만사를 배려하셨다." 이 결론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융은 자신에게 물었다. 우리의 예정된 운명 속에 이미 마련된 것으로 생각되는 죄야말로 우리를 하느님 곁으로 인도하기 위한 하느님 계획의 일부가 아닐까. 설령 그 길에 어떠한 시련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 웨인 G. 로린즈, 『융과 성서』, 이봉우 옮김, 분도출판사, 2002, pp. 22-23.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꼭 필요했었던 그 원인에 관해 묵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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