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 (2009/3/15)
 



© Suk Hoon Han                                                                                                                                                                                  
 
 

요즘 아이들은 특목고나 대학 입학 전형에 유리하다 하여 각종 경시 대회에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다('경시 대회'이므로 '경쟁적'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내 둘 딸들은 그런 대회에 나가서 경쟁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마치 천성인 듯 하다. 아이 엄마는 애들의 그런 경쟁 회피증을 마뜩지 않게 여기지만 난 그러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가 경쟁을 좋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 딸들이 그러함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한다. 게다가 딸들이 경쟁을 싫어한다 해서 참여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지들이 '경쟁'으로 여기지 않는 미술대회, 백일장, 운동회, 체험학습 등등은 스스로 좋아서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만큼. 그러나 험한 세상 살아가며 경쟁에 도태될 것을 우려하는 아이 엄마의 현실적 우려가 부당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렇다 해도, 평생 남들과의 경쟁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살아온 비경쟁적인 나로선, 애비된 입장에서 경쟁 회피증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댈 수는 있어야겠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저 경쟁을 말 그대로 피하기만 하는 겁쟁이에 불과할 테니.

예전에 직장에 갓 들어갔을 때, 큰 행사가 있었는데 마침 담당자가 외유중이어서 신참인 내가 투입돼서 정신없이 뛰었던 적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나서 내가 선배들에게 들은 말은 '너의 경쟁력이 검증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조직에 의해 '경쟁력이 검증된'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어려운 과제들을 맡아 수행하곤 했다. 당시에 나는 이런 의문을 갖고 있었다. ''경쟁력'이라니? 난 그 누구하고도 경쟁한 적이 없는데...' 사실 꽤 멍청한 면이 있는 나는 직장생활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경쟁력'이 미국에서 말하는 'competitive'와 같은 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미국 대학들이 경쟁을 조장하는 학문 공동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지금 생각해봐도 멍청할 정도로 뒤늦은 파악이었다. 나는 미국의 대학 입학 평가에서 '매우 경쟁이 심한
(highly competitive)' 곳이라고 분류되는 학교를 다녔으면서도, 한 번도 그 누구와도 경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내 페이스대로만 공부했었고 교수님이 내주시는 과제 해가는 것만으로 바빴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경쟁력이 검증됐다'는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경쟁력'을 갖춘 나의 역량에는 무엇이 있을까 따져본다. '경쟁력'이란 말 자체가 타인과의 비교―영성의 제1 장애―를 전제하므로, 남보다 잘하는 뭔가를 떠올려 봐야겠다. (남들보다 평균적으로 볼 때 잘하는 것이 몇 가지 있긴 한데, 그것들은 전부 내가 성장과정에서 받은 특혜 덕분에 습득한 역량들이라는 점을 잘 안다.)

먼저 피아노를 쳐서 청중들의(대개는 알콜의 영향력하에 놓여있는) 감성을 자극하는 '역량'을 들 수 있다. 이건 일종의 타고난 재주로, 우리 가계의 핏줄에 흐르는 음악적 재능 덕분이라고 보는데, 난 이 알량한 역량을 갖추기 위해 그 누구와도 경쟁해본 일이 없다. 물론 모델은 있었지만―옛날 옛적의 폴 모리아라든가, 아바의 베니 앤더슨, 또는 리차드 클레이더만 등등의. 난 한 번도 경쟁해본 일 없이 혼자서만 열나게 골방에서 피아노를 쳐댔을 뿐이지만 그런대로 잘 친다. 그건 그렇다 치고, 헌데 아마도 세상의 프로 피아니스트들은 나보다 더 피아노를 잘 칠 것이고, 나는 그들보다 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두 번째 '역량'으로 영어 활용 능력을 들 수 있는데, 당연히 이는 내가 미국에서 10년 넘게 대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습득된 것이다. 영어를 잘 하려고 미국에서 그 누구와도 경쟁해본 일이 없다. 나는 본받고 싶은 '모델'도 없을 정도로 영어를 잘 하는데 별 관심도 없었다. 그저 미국 대학에서 살아남기 위해 읽고, 쓰고, 말했을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그럭저럭 영어를 쓰는 일을 잘 한다. 그건 그렇다 치고, 헌데 아마도 세상의 프로 영어 선생이나 통·번역가들은 나보다 더 영어를 잘 할 것이고, 나는 그들보다 내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이성적인 예측으로 인해 조금도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세 번째로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능력을 꼽아보겠는데―그밖에는 더 생각나는 것도 없으므로―, 이도 나름대로 10년 쯤 실습하는 과정에 축적된 역량이라고 본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강의를 더 잘하려고 그 누구와도 경쟁해본 일은 없다. 단지 교육학을 공부했고, 성직으로서의 교직을 주창하는 교육자로서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가르쳤을 뿐이지만 그런대로 잘 가르친다. 그건 그렇다 치고, 헌데 아마도 세상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선생들이 수두룩 할 것이고, 나는 그들보다 내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자기평가에 의해 전혀 의기소침해지지 않는다.

세상 누구나 다 타고난 달란트가 있겠고, 그것을 가꿔서 나름의 역량을 확보한 이들이 사회 곳곳에서 맡은 바 직분을 다 하고 있을 게다. 나도 그러하다. 그런데 나는 나의 소박한 역량을 경쟁을 통해서 습득했던 기억이 없다. 단지 내가 할 일을 나 자신을 기준삼아 내가 좋은 방식으로 했을 뿐이다. 경쟁을 안했어도 그런대로 제 할 일 하며 무능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역량을 '경쟁력'이라고 일컫는 것이 매우 생경하게 느껴진다.

물론 경쟁을 기피하는 태도의 밑바닥에는 정신의 소극적인 움츠림, 도피 지향성, 또는 패배주의 등의 부정적 성향이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쟁을 기피하는 태도는 동시에 평화 지향성, 화합과 공생 지향성, 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being-ness)'에 대한 의식이라는 긍정적 성향도 한몫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기본적으로 어떤 태도든 이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지만, 그래서 어쩌면 나의 경쟁 기피증이 나약한 패배주의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평화 지향주의자이며 각 개인에게 주어진 본 모습 그대로 모두가 공존하는 이상향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 낭만주의자일 수도 있다는 긍정적 해석을 고수하려고 한다.

물론 경쟁이라는 것이 인간의(또는 생물의) 보편적인 본성(또는 습성) 중 하나일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이성적 역량만 너무 키우다보면 감정적 영역이 황폐해져서 조화로운 인격 형성에 어려움을 겪듯이, 자신의 '비경쟁-화합-공존' 성향만 너무 고수하다보면 경쟁적 영역이 미발달해서 균형잡힌 대(對)사회적 역량이 성숙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그리고 내 경우만 보더라도, 의식적으로 미발달된, 또는 억압된 나의 경쟁적 성향이 자동차 운전할 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줄곳 목격해오고 있다. 어쩌면 내게는 경쟁이 좀 필요한 건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서 경쟁적 태도를 버리자거나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또한 학습하고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방식은 개인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경쟁적 관계가 훨씬 효과적으로 성취를 이루게 해주기도 한다. 다만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타입이 아닌, 나처럼 '비경쟁적'인 인간들이 반드시 '경쟁력 없는' 인간이 된다고 보지 않는다. 비경쟁적인 인간들도 사회에 유용할 수가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비경쟁적인 타입의 인간들의 학습과 성취 방식을 '무능함'이라고 도매금으로 취급하는 현대의 인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실로, 타인과의 비교 없이도, 경쟁하지 않고도 인간이 잘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까지 내 딸들의 경쟁심리를 부추겨 그들의 '경쟁력'을 북돋아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러나 나는 내 딸들의 재능과 역량을 그 누구보다도 더 낙관한다. 나는 딸들이 자기 자신과 경쟁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때 사람은 진정으로 자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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