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009/3/7)
©
Suk Hoon Han
요즘은
할 일이 많아 아침에 깨어나서 간밤의 꿈에 관해 골똘히 따져보는 일을
잘 못하지만, 지난 주에 꿨던 꿈 하나가 꽤 선명하게 기억이 나서
기록해둔다:
내가 신분증을 또 잃어버렸다[지난
달에 지갑 도둑맞은 것의 여파인 듯].
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주민등록증을 시급히 재발급 받아야만 할 필요성에
시달린다. 만사 제치고 주민증을 새로 만들려 하니, 집에 있는 모종의
서류를 지참하고 경찰서에 가야만 주민증 재발급 신청이 가능하다는
[이상한]
사실을 깨달아, 그걸 가지러 집에 왔다. 그 서류는 안방의 장롱 깊숙이
보관돼 있는데, 그 장롱이 수십 년 전 어릴 때 우리집 안방에 있었던
부모님의 장롱인 것이다. 이 장롱을 보고도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 나는, 그러나 그 장롱 문을 열지 못한다. 왜냐하면 빨래해서 개워둔
아이들 속옷과 양말이 장롱 문에 기대어 차곡차곡 높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분홍, 노랑 빤쓰와 정말로 작은 양말들이
개워져 있는 모습이, 늘 내가 마른 빨래감을 접는 방식대로이다. 나는
빨래를 조금만 건드렸다가는 그것들이 쓰러져서 죄다 흐트러질까봐 건드리지도
못하고, 그래서 장롱 문도 열지 못하고, 그래서 서류도 꺼내지 못한 채
무능하게 서있을 뿐이다. 빨리 주민증을 새로 만들어야 할 텐데 하는
조급함만 마음속에 있을 뿐. (끝)
대개는 꿈에 등장하는
사물이 상징하는 것이 많이 은폐돼 있어서 해석이 어려워야 정상이거늘,
이 꿈은 이상하게도 상징하는 것들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 주민증(I.D.)이란
물론 나의 정체성, 또는 '자기(self)'를 상징하겠다. 내가 무슨 연유에선지
나의 진정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그걸 빨리 되찾아야겠는데,
그걸 찾게 해줄 현실적 절차를 밟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문(부모님 장롱)이라는
장벽과 가족(애들 속옷)이라는 장애물이 내 앞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롱은 가풍, 전통, 또는 보수적인 어떤 성향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롱 문을 쉽게 열어제끼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속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는데, 그 앞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빨래는 치울 엄두를 못내겠다. 바로
나 자신이 공들여 쌓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다.
따라서
해몽은: 내가 내 본연을 찾아서 나아가야만 할 길이 있고, 그것은 아마도
전통의 굴레를 벗어난 어떤 것일 텐데, 내가 그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해몽이 너무 쉽게
되는 게 좀 께름직하긴 하지만.)
해몽은 했는데, 새삼스레 내가
찾아내서 나아가야 할 본연의 길이 무언지를 모르겠다. 나는 지금의
이 삶 자체로도 내 본연의 길을 기본적으로는 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물론
'잘' 가고 있는지 어쩐지는 자신이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소명(calling)'에
응해 내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므로). 전통의 굴레를 벗는 것까진
그렇다손 치더라도, 자식들 부양의 책무까지 제쳐두고 나아가야 할 나의
길이란 게 과연 무엇일지....
밥상머리에서 가족에게 이
꿈 얘기를 했더니, '상징'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라며 둘째 나나가 마구
애비를 윽박지른다―자신이 못 알아듣는 말이 나오는 걸 용납하지 않는
아이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나더니 대체로 이해를 했는지, 내게 '그럼
아빠가 그 빨래를 치웠느냐'고 되물었다. 꿈을 깰 때까지 못치웠다고
답해줬더니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그럼, 애비가 그래야지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애비가 늙어가는 주제에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자기만의 길'을, 그것도 새끼들마저 버리고 가겠다는 건지, 터무니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나나의 속마음이 텔레파시로 내게 전해져 왔다.
머리
깎고 입산수도하라는 진아(眞我)의 메시지는 아닌 것 같고.... 세속의
일로 분주했던 터에 느슨하게 돼버린 수행의 끈을 다시 죄라는 메시지일까?
해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 자문할 도리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