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패닉 (2009/7/29)
©
Suk Hoon Han
과거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월말에 공과금 다 빠져나간 뒤의
예금통장이었다. 그것이 그리도 무서운 이유는, 어떤 때엔 그걸 보면 내
인생 자체가 실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은행 잔고의
밑바닥이 보이는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나의 감정은 이런 자탄의 술수까지
내게 씌운다: '이 멍청한 놈아, 넌 세상의 놀림걸이에 지나지 않아!
수행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수행! 제 처자식 먹여살리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패배자 주제에!'라며.
이런 감정적 술수는 독자적 수행의
길을 좇는 내 삶을 총체적 실패로 간단히 규정해준다. 단, 나는 그것이
감정이 '오바'하는 술수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최소한 처자식을 먹여살리고는
있기 때문이다.
헌데 이제 나는, 어느 덧 이 공포감을 대면하는
데 익숙해졌는가 보다. 예전에는
공포에 대해 감정적으로만 반응하여 '패닉'한 나머지, 수행 중 터득한
초강수들을 수리수리 마수리 허겁지겁 동원하기에 급급하였는데, 이제는 그런 강수
방어책들을
건드리지도 않는다. 그냥 괴로워 한다. 그러니까, 앉아서 그대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돈이 떨어져 근심에 빠진 나의 괴로움은 어디서
동정받을 가치도 없는 것이, 평소에 애들 데리고 놀 것 다 놀고, 먹을
것 다 먹으며 잘 살기 때문이다. 어쩔 도리없이, 영 개미는 되지 못하는 베짱이인 나
자신을
또 한 번 긍정해준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 수그러들고 이성이 고개를 치켜든다.
'자,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난관을 뚫고 나아갈
계략을 짜내자!'
계략이라 해봤자 어디 돈 벌 일거리 없을지
찾아나서는 정도다. 하지만 나는 잠간 괴로워 한 뒤에 유쾌하게 돈벌이
찾아나설 수 있게 된 나 자신에 대해 자못 자긍심을 갖고 있다. 그건 과거에는
그리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많이 걸렸었음을 잘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통장 잔고의 바닥이 드러나서 패닉하는
경우, 나의 행동에는 대체로 전형적인 순서가 있었다. '이크,
클났다!'하며 곧 우울해지고, 자기부정에 빠진다. 그리고 가장
속성 해결책으로 간주되는 방안들을 찾아나선다. 예를 들어, 로또 복권
사기. 실제로 자금 압박에 시달리던 어느날 밤, 화려한 색깔의
달팽이가 나오는 희안한 꿈을 꾸고는 다음 날에 복권을 사본 적도
있다―물론 꽝이지만. 실로 가장 실현 가능성 낮을 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에 제자들에게 말할 때 가장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요행수를
노리는 속성 땜빵책'을 패닉의 순간에 가장 먼저 찾게 된다는 것은 대단히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심함의 극치다.
때로는 속성책을 찾다
말고 아예 문제를 무시, 외면, 회피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이럴 땐 공부도,
일도 잘 안 하고 넷 서핑이나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계속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어쩔 도리없이 돈을 만들 다른 쉬운
방도를 찾아본다. 예를 들어, 집에 뭐 팔만 한 것 없나 살펴본다든지―건질
것도 없지만. 또는, 나 홀로나마 지출 동결 모드에 들어간다('가장'의
돈지갑이 빵꾸가 났음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말라!). 연구실에서 꼼짝
않고, 돈 한 푼 안 쓰고 산다. 이런 비장한 삶의 태도는 어느 새 자연스러운
내 습성이 돼버려서, 형편이 풀려도 나 자신에게 돈 쓰는 일은 없다.
학생들로부터
'검소하다'든지, '수수하다'든지, 아니면 '소박하다'는 등의 평을 지속적으로
듣는데, 아마 그런 것들이 다 '없어 보인다(貧티 난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멍청한 짓들을 하다보면 서서히 이성이 되돌아온다.
'이게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돈 벌 수 있는
합리적인 대책을 세우게 된다. 지식 팔아먹기나 번역이라든가, 영어
교습 등의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하여 다행히
당장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되면, 그제사 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며
초심의 질문이 되살아난다: '내가 원래 뭘 하려던 거였지?' 그러면 명상이
재가동되고 고전을 꺼내 읽을 수 있게 된다. 당장의 지식 팔아먹는 돈
벌이를 위해서라도 고전을 꺼내게 된다. 그리고 원래 오랫동안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패닉 모드 이후에 완전히 까먹어버린 그 법칙을 기억해낸다:
'오직 정도(正道)를 고수함으로써만 수행 뿐 아니라 먹고 사는
경제 문제도 가장 성공적으로 진전된다'는. 그리하여 진인사대천명의
지혜를 떠올리며 내 할 일에 최선을 다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바치고 난 뒤에 하늘의 뜻을 따라야 하리라. 최선을 다 바쳤는데도 재정
파탄에 이른다면, 그 때엔 허허 웃는 수밖에 별 도리 없지 않겠나.
결국,
이따금씩 재정 상 일어나는 패닉 모드는 신(神), 또는 영적인 스승께서
나태해진 나의 머리통에다 한 방 날려주시는 주장자(柱杖子) 일격(一擊)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