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의
습성 (2009/2/20)
©
Suk Hoon Han
아침식사
때, 토스트에 잼을 과하게 많이 바르는 어린 딸을 넌지시 나무라자,
쓸데없이 웬 참견이냐는 눈빛으로 애비를 째려본다. 딸은,
왜 아빠는 잼을 그렇게 조금 바르냐, 그러면 맛이 안난다며 외려 핀잔을
준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나는 1960~70년대 아동기 때 습성으로 지금도
식빵에 잼과 버터를 얄팍하게 바른다. 비싼 잼과 버터를 아껴야 하니까―사실
그 시절에 토스트에 잼 발라먹는 집도 별로 없었지만.
그러나 70년대처럼 잼과 버터가 비싸지 않은 요즘에야 그럴 것까지는 없다.
잼을 식빵에 거의 색깔만 묻어날 정도로 얇게 바르면
맛도 제대로 안난다. 어릴 때 어쩌다 실수로 빵에 잼을 잔뜩 쳐발라서
할 수 없이 그 많은 잼이 발라진 토스트를 먹었을 때, 처음으로
경험해본 그 풍성한 맛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옛 시절의 궁핍한
습성을 요즘 아이에게 요구하는 내가 어리석다. 이왕이면 빵을 맛있게
먹어야지.
나보다 훨씬 젊은 대학생이었지만 가정 형편이 안좋아서 나처럼
잼을 아껴먹으며 자라야 했던 한 학생의 글이 기억난다. 그 학생은 빵에
잼을 조금만 많이 발라도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던 일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그같은 질타 때문에 자신의 집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그 학생은 취직을 했으니 이제는 내 딸처럼 토스트에 잼을 듬뿍 찍어발라
먹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 나도 아침 토스트를 더 맛있게 먹기 위해
앞으로는 잼을 더 풍성하게 찍어발라야겠다.
궁핍한 70년대의
식습관을 21세기를 훌쩍 넘겨서까지 이어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형편이 달라져서 더 이상 그러지 아니해도 되거늘, 여전히
습관적으로, 관성에 의해 보전하고 있는 불필요한 과거의 행동거지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구차하거나, 빠듯하거나,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짓들로, 근본적으로 두려움에 맞닿아 있다―고생스럽고 넉넉지 못한
인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상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말이다.
즉, 내 앞에 어떤 풍요와 아름다움이 찾아온다 해도, 세상이 무서운
줄 알아야 하는 나는 그 풍요와 아름다움을 감사하며 맞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구차하게 아끼고 숨겨두었다가 결국에는 유효기한을 넘겨 상실케
되고 만다. 이런 궁핍한 태도의 화신과도 같았던 사람이 나의 외조모셨다.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수많은 여인네들은 대개 나의 외조모와
같이 궁핍하고, 빠듯하고,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하고 살았고, 그
반대급부로 생존에 대한 이악스러움은 강화됐었던 것 같다. (어쩌면
두려움이야 말로 '생활력'을 강하게 해주는 요건인지 모른다.)
이런
궁핍과 구차함의 태도를 사회로부터, 외조모로부터 물려받았던 내가
이십대에 부자나라 미국에 건너가서 미국인들의 판이한 삶의
태도를 접했을 때, 실로 내 마음 속에 경이가 피어올랐다.
그 나라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들은 이런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이탈리아인들은
인생을 안다.' 왜냐하면 그들은 파스타와 포도주로 풍성한 저녁식탁을
차리고 날이면 날마다 가족과 친지가 둘러앉아 흥겨운 저녁시간을
즐길 줄 아니까.
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아끼고 모으기만 하는
삶의 오류를 깨달았고, 그래서 낭비하고 써 버리며 즐기는 삶의 쾌락에
눈떴는데, 아마 그래서 술을 더욱 좋아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 결과,
비록 습관적으로 딸내미의 잼 바르는 행태가 낭비스럽다고 느껴
무심코 잔소리를 할 때는 있어도, 대체로 먹고 마시는 데 돈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즉, 자질구레한 것을 쪼잔하게 절약하며 생활하는
습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어도, 틈만 나면 고기에 과일에 잔뜩 사다가 식구들 먹이고, 친구들 술값
내는 데 인색하지 않다.
사실 먹고 마시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겠다. 돼지같이 먹고 마시는 나도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일
터이니.
그저 금욕주의적 스토아 학파 보다는 쾌락주의적 에피큐러스 학파의
스타일 쪽으로 다소 기울어져 있는 정도겠다. (사실, 스토아 파의 모범생
아우렐리우스는 에피큐러스를 찬양했었고.) 아무튼 간에, 살아가며
형성된,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 속에서 삶에 대한 나의 태도의 변화 과정을 엿볼
수 있음직 하다. 이를테면 삶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감소한
것 같다. 뉴에이지 영성의 유행어를 쓰자면, 지금 이 순간을 신이 주신 선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능력이 증대된 것 같다.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을
숨기고 아껴서 모아두는 개미를 본받기보다는, 신께서 주신 선물을 받은 자리에서
펼쳐놓고 향유하는 베짱이적 삶을 실천하는 편이니.
허나 실제
삶에서는 개미와 베짱이 사이의 중용이 가장 현명한 길이 아닐까 싶다.
뉴에이지적 영성의 낙관에 푹 빠져서 '케 쎄라 쎄라' 외치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맑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베짱이처럼 하루 하루를 축복의
파티로 마감하려 했던 신앙의 초기가 슬쩍 지나가고 나니, 개미처럼
파티를 뒤로 미루는 이른바 '마시멜로'의 교훈이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지나친 베짱이도,
지나친 개미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결론내리게 됐다. 잼을 듬뿍 발라
맛있게 토스트를 먹는 내 딸의 현명함(?)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잼 같은
것을 아끼는 나의 궁핍한 습성 또한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하기 때문이다. 아마 궁핍에, 결핍에 질식해서 심신이 피폐해지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결핍도 숨겨진 선물로써, 축복으로써 주어졌으리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