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사는' 이유 (2009/4/6)
©
Suk Hoon Han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글을 읽다보면 그가 신에게서 받은 특별한 은총에
대해 감사한다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나도 그와 같은 생각―내가
신에게서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 남들보다 운이 좋다는―을 갖고 산다.
특히 내 주변의, 일에 치이고 삶에 치여 살아가는 여러 인물들을
고려해볼 때, 내 '운세'가 가장 좋은 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발 더 나아가, 돈도 많이 못 버는 내가 개중에서 제일 '잘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실은 나의 이런 주관적 생각은
여러 지인들―그중에서도 돈 잘 버는 이들―의 나에 대한 평과도
일치한다. 나는 스트레스도 별로 없고, 심적 번민도 없으며, 평화롭고
재미있게 매일 매일을 살며, 모든 일상 속에서 의미를 보면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십 년을 이어온
수행에도 불구하고 한심한 수준의 심리적 통제력과 사회적 폐쇄
성향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어쩌면 꽤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다지 '잘
살지' 못 하고 있는 내 주변 인물들에 비해 내가 보유하고 있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단지 내 '운세' 또는 운명일 따름일까?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는 무얼까? 혹은, 실은 내가 조금도 성공적으로
살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불감증에
걸려있을 뿐일까?
만약에 내 운명이 나를 잘 살게 만들어준 주된
요인이었다면, 부모님 덕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다. 부모님 덕분에
멀쩡하게 양육됐고 좋은 공부 다 해서 이렇게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세상만사가 겉 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법이어서,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 우리 집의 역사에도 그
뒤켠으로는 상처입고 그늘진 부분이 숨겨져 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부모님 덕에 이만큼이나마 할 수 있었다는 점을 완전히 인정한다.
그런데 내 주변의 현재 잘 못 살고 있는 이들을 보면, 나의 부모님
못지 않게 좋은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났고, 우리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이
부유한 집안 출신이거나, 또는 최고의 교육 기회를 누렸다든가, 신체적,
지적 조건이 나보다 우월한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점은 과연 내 '팔자'일 뿐일까, 아니면 불감증에 사로잡힌 나의
지독한 자족감일 뿐일까?
어쩌면 그 두 가지가 조합됐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팔자를 타고 난데다가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늘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
거기에 하나 덧붙여보자면,
내가 이른바 '참된 나'를 만나는 특이한 체험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체험으로 인하여 '자기실현'을 지향하는 삶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은 자기실현만 제대로 지향하고 있는 한,
내 삶을 타인과 비교하거나 사회적 잣대로 규정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주어진 그대로에 만족할 수 있고, 그래서 속 편히 잘
먹고, 잘 놀고, 잘 일하며 살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허나
그렇다 하여 나의 '자기실현 지향성'을 내가 잘 살고 있게 된 첫째 요인으로
꼽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밥맛없는 에고 팽창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첫째 요인은 운세, 또는 신의 은총의 몫으로 남겨두련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나의 '특이한 체험' 역시 신의 예외적인 은총이기에, 결국은
이게 다 신의 은총 덕분이라고 해야 할런지...
이런 식의 논지를
이어나가다 보면 캘빈 식의 예정설과 맞닿아 무력한 '내가'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지 않냐는 체념이 발생할 여지도 없지 않으나, 하지만 신의
은총을 '안다는 것' 자체가 거대한 존재론적 선택이고 그 선택의 주체로서의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의 교훈: '지금 여기에 이렇게
숨 쉬고 있는 그대로가 신의 은총임을 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