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한 여름

한가한 여름 (2009/7/13)

학부 수업 5개와 대학원 수업 3개를 맡아 헉헉거렸던 1학기가 끝나고 나니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방학 동안의 돈벌이 계획도 좀 있었는데 모두 무산돼버렸고 결국 여름 백수 신세다―개인 연구실에서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는 화려한 백수이긴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집필에 몰두해야 하는' 백수이건만 요즘 사정이 딱히 그러하지 못하다. 둘째 책도 대강이 다 잡혀 있고 상당 부분 원고가 진행되고 있지만 요즘은 집필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뭔가 원고 내용에 대해 맘에 안 드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 그걸 삼빡하게 처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어영부영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요즘 아주 오랜만에 한가해졌다.

어디 얽매여 하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한가하긴 하지만, 집필과 공부는 계속 진행중이어서 놀러 다니진 않는다. 누가 부르지 않는 한 가능하면 외출도 자제하고, 술자리도 피하며 집과 연구실만 오간다. 매일 산에 오른다. 지난 겨울 호주의 동생 집에서 연일 바베큐 구우며 뱃살을 찌워놓았다가 1학기 내내 운동을 제대로 못하고 지내다보니 바지가 안 맞을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매일 산에 오르며 체중 조절한다. 이런 나를 보고 지인들은 건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느니, 또는 외모 관리를 열심히 한다느니 놀리기도 하지만, 실은 그보다 더 급박한 이유는 새 바지를 사기 싫기 때문이다. 나는 옷장 관리를 병적으로 귀찮아 한다. 아무튼 어떤 연유에서건 결과적으로 산에 열심히 다니게 됐고, 그래서 매일 한 시간 씩은 산행을 통해 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다. 헌데 요즘 산에는 중년의 남녀 등산객들이 아주 많아서 사람들 소리로 산이 시끌벅적해지고, 그러면 진행하던 성찰이 멈춰버리기 때문에 나는 가능하면 조용한 때와 장소를 골라 산에 오른다. 특히 폭우가 그친 뒤의 늦은 오후 시간대가 제일 고요하다.

또, 매일 책도 많이 읽는다. 융의 분석심리학 책과 듀이의 철학서와 신화학 책 한 권 등을 매일 바꿔가며 읽는다. 모두 무겁고 깊은 내용이어서 빨리 읽어치울 만한 성격의 책들이 못된다. 모두 삶속의 수행에 비춰 깊이 성찰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내용인 만큼,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며 나 자신을 곱씹어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독서에 속도가 붙지 않는다. (난 워낙에 속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음악도 듣는다. 요즘은 그리그의 페르귄트 모음곡이 듣기에 좋다. 연구실에는 형편없는 음질의 포터블 CD 플레이어밖에 없지만, 참고 들어줄 만 하다. 약 반 년 동안 멀리 했었던 피아노도 슬슬 다시 쳐본다. 새롭게 치는 곡은 없지만, 하도 안치다보니 손가락에 절도가 사라져버려서 전부터 치던 곡들을 복습해본다.

한가해진 틈에 되돌아보니 지난 학기,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나름껏 열심히, 성실히 수업을 했다. 학부생들은 신선해서 예쁘지만, 그중에서도 복학생들이 대하기 더 편하긴 하고, 또 그보다는 삼십대 이상의 대학원생들이 더욱 더 편하다. 내가 통이 큰 리더 형 인간이 못돼서 어린 학생들을 잘 다독이고 보살펴주는 데 소질이 없다. 다만, 한 학생이 대학 들어올 때의 심정을 "가고 싶은 학교는 있으나 가고 싶은 과는 없었다" 라고 적확하게 표현해줬듯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교육을 사회경제적 보상을 위한 수단으로써만 간주해오다가 성학(聖人의 경지를 지향하는 학문), 또는 자기실현으로서의 교육을 제시하는 내 수업에 자극받아 긍·부정적 반응을 보임에, 내가 그러한 자극을 제공하는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주어진 여건 하에서.

어쩌면 내가 강의자로서 연륜을 쌓아가며 이른바 지적, 영적 자극을 제공하는 수완을 키우는 데 성공한 게 아닐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호의적인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건 해가 갈수록 상담을 청해오는 학생들의 수가 늘어감을 목도하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수업을 맡았던 지난 학기에 상담을 요청한 학생이 가장 많아서, 네 명의 학생에게는 술을 사줬고, 예닐곱 명에게는 커피를 사줬다. (술 사준 학생들은 전부 남학생이고, 커피 사준 학생들은 전부 여학생이다.) 그밖에 이메일로 상담에 응해준 여러 학생들까지 치면, 사실 지난 학기를 꽤 바쁘게 보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오래 된 제자들도 이따금씩 소식을 전해오거나 인생 문제로 상담을 청한다. 아마 이 글도 읽고 있을, 일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수제자 Y군도 꾸준히 조언을 청해온다.

다 좋은 일이다. 기쁜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다. 어여쁜 제자들에게 커피와 술 정도 못 사주겠는가. 세상에 나를 청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감사해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헌데 좀 께름찍한 것이 있다. 그건, 남들에게 읽히는 것이 첫째 목적인 지면이었더라면 말을 꺼내기도 쑥스러운 일로,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나에게 '존경'을 표해온다는 사실이다.

뭐, 타인의 존경이 부담스럽다거나 그렇단 얘기가 아니다. 지레 겸손을 떨려는 것도 아니다―사실 '수행일상'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나 자신이다, 나의 '수행'을 위해서 쓰는 '일상'이니까. 또는 수행자 주제에 남들의 존경을 받으면 기고만장해서 에고가 부풀어오르고 그래서 찍 미끄러질까봐 두려워 하는 것도 아니다―내가 매우 겸손하지는 않다는 사실은, 나는 이미 그 정도 수준은 '패쓰'했다고 자평한다는 데서 드러나기도 한다. 남들로부터 존경받고 살면 좋지 뭘 복잡하게 따지냐고 핀잔할 수도 있으나, 학생들이 표하는 존경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은 적지 않이 복잡하다.

나는 사춘기에 나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근무하시던 회사에서 아버지가 경영 수뇌부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공장 근로자들의 복지 증진책을 추진하시다가 좌천됐다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였다. 당시에 아버지께서는 만취하여 귀가하시어 잠든 여동생을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며 공장 '여공(70년대)'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렇게 어린 애들을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혹사시킬 수가 있는가.]"

나는 그런 아버지가 존경스러웠다.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약자를 위해 일하셨다는 것이. 비록 이제는 팔순에 이르러 조선일보 사설 논조만 되풀이하시며, 사회적 약자를 몰아치는 MB 정권을 극구 옹호하시는 '보수적' 노인이시지만, 아버지의 그같은 과거의 희생 '전력'이 자식의 마음속에 자발적으로 존경심이 우러나게 했었음을 자식은 기억한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희생하고 무얼 바치고 있길래 학생들의 존경을 받을 만 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 생존해계셨을 적에 하루는 아버지가 거나하게 취해 귀가하시어, '아무개가 나를 존경한다더라'며 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여러 학생들에게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나는 결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도 못한다, 술에 취했건 말건 간에. 타인의 존경의 표명에 기뻐하시는 아버지가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하겠다. 존경을 받기를 부끄러워 하는 내가 부자연스럽고 불건전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존경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고,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자이다.

왜 그다지도 자격이 없다 하는가? 나는 '희생'하고 '헌신'한다는 말을 듣기에 합당한 일을 한 적이 없다―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며 일한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하늘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은 엄청나게 많은데 되갚는 것은 쥐꼬리 만한 위인이다. 나는 말은 대단히 앞서고 몸은, 실천은 영 뒤쳐질 뿐인, 입만 살아있는 '먹물' 증상을 버리지 못하는 수행자에 불과하다. 게다가 자신의 그릇의 크기를 잘 알기 때문에, 인격의 완성도에 대해서 특히 낮은 기대치만을 갖고 있다. 푼수, 찌질이, 술꾼을 한몸에 지니고 가겠다고 떠드는 것이 높은 도심(道心)에서 우러난 형이상학적 선언이 전혀 아니라, 워낙에 그저 그런 인물에 지나지 않음에 대한 과학적 결론일 뿐이다. 거기에다 마음의 심리적 작용은 복잡하고 뒤틀려있기 그지없어서, 의식의 표피 아래에 붙어있는 위선 덩어리가 도무지 몇 개인지 정리가 잘 안된다. 내가 융의 분석심리학을 꾸준히 읽는 이유는 이처럼 뒤틀리고 불완전한 내 내면을 정돈할 심리적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듀이를 자꾸 되읽는 이유는 그의 교육철학을 실천을 통해 체화시키지 못하고 스승님들로부터 이론으로써만 수용했음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내가 신화학을 읽는 것은 방학이 되고보니 벌이가 시원치 않아 경제 사정이 빈한해진 것에 대해 기분이 나빠졌고, 그래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해 유치한 불만감을 갖고 문명적 대안의 망상을 꿈꾸고 싶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무리 따져봐도 이런 나를 존경받기에 합당한 인물로 내세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더러 선생질을 하라는 것이 나의 참된 자기(自己)와 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그래서 별 도리 없이 선생질을 하고 글을 쓴다. 다만 선생에 합당한 존경을 받을 만한 얼굴 두께는 만들어지지가 않는다.

이 모든 한심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신의 은총을 두텁게 입었음을 매일 매일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이런 한심한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 즐겁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에는 게을러서 글도 잘 못쓰고 있지만, 이러다 언젠가는 정신 차리고 원고 집필에 몰두할 수 있겠거니 하며, 그저 낙관하고 산다. 내가 책읽고 공부하는 것, 글 쓰는 것, 이런 것들은 사실 기본적으로 내가 못나고, 미흡하고, 불충한 부분들을 메우기 위한 모색에 불과할 수도 있다. 허나 내가 못나고, 미흡하고, 불충한 점들도 다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어 그리 형성됐을 것이므로(재앙의 외양을 걸친 신의 축복으로써), 그것을 비관하지 않고 수행의 조건으로 삼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합당치 않은 존경을 받지만 않는 한, 자신에 대해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존경을 받는다면 부끄러워진다. 그래서 존경받기가 싫다.

다음 주에는 아버지를 모시고 가족들이 동해안으로 바캉스를 다녀올 것이다. 존경받기에 합당한 분이셨음에도 자식된 나는 아버지께 제대로 존경과 사랑을 드리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이럴 때나 좀 모시는 척 해야겠다. 방학이 되어 한가해진 덕에 이것처럼 쓸데없는 낙서도 길게 끄적일 수 있지만 자식 노릇도 좀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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