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과제 (2009/8/4)
©
Suk Hoon Han
가족끼리는
항상 서로 보고 살다보니 세월의 흐름에 따른 외양의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내 딸들도 몇 해 전 사진을 꺼내봐야 그간 훌쩍 큰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번에 여름을 맞아 아버지를 모시고 여동생네까지
온 집안이 함께 피서를 다녀온 후에 찍은 사진을 보고는, 아버지의
노화의 정도에 새삼 놀랐다. 하긴 곧 팔순이시니...
나는
아버지에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 하려 노력을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에는, 자평컨대 나의 최하의 수준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즉, 피해의식에 빠져 조바심과 불평으로 가득 찬 아동의 수준이
튀어나오고―이를 한 심리학자는 '내면 아이(inner child)'라고
부른다―, 그에 따라 주변인들에 대한 평소의 관대함도 사라져버린다.
그러한 내면 아이와 대면하는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기에, 나로서는
아버지를 모시고 장거리 여행을 다녀오는 것을 마음에서 우러나와 좋아하지는
못한다.
이번 여행길에도 아이들은 잘 놀고, 잘 먹으며, 행복을
누리고 있음이 자명해보였으나, 나는 일종의 몸에 좋은 쓴 약을 먹는다거나,
아니면 나를 단련시키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기분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다녔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최하의 수준을
바라보는 것 자체로 고난도 수련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아버지는
내 여동생, 즉 당신의 딸에 대한 집착이 많으신 편이다. 하루는
물놀이가 끝난 저녁 때에 여자와 아이들은 먼저 숙소에 들여보낸 뒤,
내가 매제와 함께 읍내에 저녁 장보러 다녀오려 했는데, 아버지께서도
노구를 이끌고 동행하셨다. 읍내 마트에서 아버지는 여동생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챙기는 데 여념이 없으셨는데, 그 물품들 중 몇 가지를
내가 골라서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아버지는 내가 고른 그 물건들이
동생이 원한 바로 그 물건이 확실한지 몇 차례 내게 물으셨다. 이런
질문을 두 번 이상 받으면 나도 짜증이 샘솟는다. 나의 '내면 아이'가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내가 분명히 정확한
물건을 골라 넣었다고 여러 번 확답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직접 장바구니를 뒤져서 내가 집어넣었던 그 물건을 당신 눈으로 한
차례 더 확인하시는 것이었다. 마치 나의 말은 믿으실 수가
없다는 듯이.
나는 과거에 차를 운전할 때, 아버지께서
조수석에 앉으셔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에게 끝없이 잔소리를 하시고
경고하시는 것을 견디지 못하여 폭발해버렸던 적이 있다. 내면 아이가
폭발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번에는 그런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날카로운 깨달음이 일어났다. '아하~, 바로 이런 느낌이겠구나,
완벽주의적 정리정돈 '벽(癖)'이 있는 '가장'인 나의 감시의 눈초리
앞에서 나의 처자식들이 평소에 느꼈을 법한 그 압박감이!'
나는
결벽증은 없지만 정리정돈벽이 있다. 내 연구실은 일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돼 있다. 그러나 우리 집은 그러할
수가 없다―나 외에 세 명이 더 살고 있으니. 아이들은 언제나 한 번
쓴 물건을 제 자리에 갖다 놓지 않는 법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늘 잔소리
들으며 보낸 아동기와 사춘기를 혐오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내 집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정돈벽이 있는
인간이 그것을 억누르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 별 수 없이 때때로 '무질서한'
식구들의 행동을 지적하고, 핀잔준다. 이러한 나의 지적과 핀잔을 일상적으로
당하며, '우월한' 애비의 완벽성을 추구하는 눈초리 앞에서 숨막히며 살아왔을
내 식구들의 심정이 꼭 이러했겠다는 깨달음을 이번에 얻었다, 아버지의
그 '확인 벽'을 내가 당해봄으로써. (이렇게 적고보니 내가 엄격하고 무시무시한 애비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내 딸들은 나를 때리고, 발로
차고, 끌어안기를 예사로 한다.)
요즘들어 나는, 선천적으로
내게 주어졌을 성향들과 후천적으로 형성됐을 성향들의 경계에 대해
숙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최근의 뇌과학이나 정신의학 분야에서
제기되었듯이, 한 개인의 자신감과 같은 것마저 후천적인 영향보다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바가 더 크다는 학설을 접하며, 나의 여러 긍정적, 부정적
성향들의 원천에 대해 숙고를 더하게 된다. 예전에는 내 성향의 원천의
많은 부분이 나의 부모님의 영향일 것으로 추정했었는데, 갈수록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 즉, 내가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여기는
나의 개성의 여러 측면들이 부모님의 양육과는 무관하게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결정된 바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는 말이다. 예전에도
나는 나의 부모님의 양육 방식을 비난하거나, 또는 나의 개인적 문제점의
원인을 제공했다며 부모님을 비판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러하지 않는다. 아직은 또렷이 알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나의 개성의 주요 부분들이 선천적으로 결정됐다고 믿고 있다. 그러한
개성이 부모님과 상호작용하며 때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아버지와 성장기에 잘 지내지 못했을 뿐이라고 믿고 있다. 어머니와는
유아기에 '잘 지내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드를 빌어 논해야
할 바들이 너무 많고 복잡하다. 아무튼 적어도 내 의식 수준에서는
조금도 부모님을 비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생겨먹게 된 것은 다
그럴 만 한 선천적인, 또는 '영적인'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는
말이다.
타인의 통제를 거부하는 나의 망아지 같은 성향이 성장기에
아버지와 상호작용하며 빚어낸 여러 가지 마찰과 갈등,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서 지속되고 있는, 팔순 노인과 오십견을 앓는 남자 사이의 상호
조절 과정... 이 모든 것이 이유가 있어서 주어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 이유란, 나로 하여금 어느 한 쪽을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계속 얽매어 있거나, 아니면 시원하게 해방되거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론 나는 얽매임이 아닌
해방을 구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엿봤다. 과거에 젊은
나의 영혼을 갉아먹던 아버지의 잔소리와 끝없는 의심, 그것을 이번에는 감사로
받아들였다. 그것들이 바로, 나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해주기 위해 마련된
장치였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해탈로 향하는 길에 놓여있는 일견 불쾌해보이는
조건들이 해탈의 훼방꾼으로써가 아니라 해탈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으로써
제시되었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