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교'에
관한 낙서 (2009/3/22)
©
Suk Hoon Han
<별로
읽을 만 한 가치가 없는 독백 수준의 낙서>
요즘
한 고급 승용차 광고에 나오는 말: '프레스티지' 앞에 '트루'를 붙일 수
있대나 없대나... 워낙 우리나라 방송 매체의 언어를 외국 말이 도배하고
있는 처지에 특별히 이 광고에 시비를 걸 것까지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프레스티지'라는 외국 말의 뜻을 아는
이들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다수(majority)에 이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프레스티지'는 분명히 외국어이고, 그 말 뜻을 한국인들이 알아야 될
의무 따위는 없다. 아마도 이 광고는 구매 계층의 차별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을지 모른다―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고소득층으로.
업계의 비즈니스 전략에 대해 뜬금없이 내가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 있으나, 그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의 농간에 지겹게
휘둘리는 우리의, 아니 나의 의식의 가벼움에 대해 가볍게 메모해두고자
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나는 강의 때 교묘히 영어 또는 일어 원어를 발음한다.
이것은 김용옥 선생이 강의 도중에 가끔가다―아마도 의도적으로―한자나
그밖의 외국어를 네이티브 발음을 따라서 읽는 것과 유사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좋게 보아서 이건 일종의 강의 기교라 하겠다. 선생이 먼 나라의
이국적 느낌을 강의실로 끌어들일 수 있기에 학생들에게 수업 내용의
풍부함과 다양성에 대한 정서적 고양 효과를 제공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강의를 좀 덜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 좋게 본다면 일종의
문화 사대주의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선생 본인이 바로 문화적
사대주의의 효과를 염두에 두고 '네이티브 발음'을 활용하고 있다면.
노골적인
문화 사대주의에 대해서는 많은 청중들이 반감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을
아는 나는 교묘히 원어를 활용한다. 적재적소에, 마치 꼭 필요한
경우일 듯 싶을 때에만 한하여. 내가 고등교육 학위를 전부 미국에서
받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나의 이같은 네이티브 발음 활용법이 나의
학생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10년 강의 경험 끝에 터득할
수 있었다. 일종의 '아우라(aura)' 형성 효과라고나 할까. 즉, 서구적이지만
사대주의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 독특한 나의 상(image)을 은근슬쩍
퍼뜨리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내가 원산지에서 직접 가져온 학문의
내용을 신뢰하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그 원산지의 충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자신과 똑같은 한국 토종으로서 토종적 인식을 존중한다는
점에 종종 호감을 갖게까지 된다. 여기까지 거짓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기교도 배어있다. 나는 평소에 오렌지 쥬스를 '오뤤지 쥬스'라고
발음하지 않으며 커피를 'coffee'라고 발음하지 않으며 생활하지만,
강의실에서 학문 용어를 원어로 소개할 때만은 네이티브 발음을 구동시킨다.
다분히 고의적이고, 기교적이다.
물론 움베르토 에코가 '외교적
기교'라고 일컬으며, 은근슬쩍 자신의 객관적 자격을 상대방에게 흘리는
행동이 인간관계에서 제공해주는 현실적 유용성을 긍정하듯이,
내게도 이런 기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학교의 전임 교수도
아니고 사회적 명사도 아니며 '시간 강사'인 내가 아무런 '아우라' 형성
기교 없이 순수하게 교육의 열의만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갈 때, 어떤 학생들은
나의 학문에 대해 부지불식간에 저평가 시각을 가질 수도
있고, 그러한 선행 절차는 결코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학력과 경력 등등을 화려하게 광고하는
세련되지 못한 방법으로 아우라를 조장할만큼 뻔뻔한 위인도 못된다. 이런
판단으로 나는 줄곳 외교적 기교를 활용해오고 있다.
세상에
흑백론적으로 결론내릴 사안은 지극히 제한돼있고, 나의 외교적 기교
역시 그런 사안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하게 보자면
기교를 부린다는 것, 즉 상대방을 홀린다는 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위배되고, 따라서 선생으로서
취하지 말하야 할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교부림으로 인해
학습 효과를 고조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면, 또 그것이 기본적으로 거짓말도
아닌 바에야 그럭저럭 지속해도 될 만한 행동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서구에 대해 품고 있는 역 오리엔탈리즘의 사대성향을 미묘한
차원에서 수긍하고 나아가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나의 기교는 비교육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현실을 어떻게 아무 기교도 없이
살아나갈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 간의 사랑도 기교를 완전히 무시했다가는
깨어져 버리기 쉬운 일이거늘.
아무도 신경 안쓰는 나만의 도덕적
딜레마일지 모르겠다. 세상은 딜레마 투성이고, 내가 안고 가는 그 딜레마들을
여기에 기록이라도 해둬야 직성이 풀리겠다. 한학을 하시는 나의 길벗님들에
비할 때 서양물을 많이 먹은 나의 언어생활의 딜레마는 내 영성이 걸어온
방황의 여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