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게으름의 정당화 (2009/3/28)

나는 게으르다. 그래서 대학 교수가 못 됐다―또는, 안 됐거나. 삶에 대한 나의 이같은 나태함은 비웃음의 대상이 돼 마땅하다―어쩌면. 남들이 비웃건 말건 그건 중요치 않지만, 현실적으로 대학 교수 수준의 벌이를 못 하고 있으니,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처지에 어디 가서 변명할 건덕지도 없다.

그래도 변명 거리가 있다. 이것이 나의 '개성화(individuation)'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 변명 거리를 존경하는 융 전문가 이부영 선생님의 글에서 찾아냈다. 다음과 같은 훌륭한 글이다:

부름을 받았든 못 받았든 신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퀴스나흐트에 있던 융의 집 입구 상판에 새긴 이 델피의 신탁은 '자기'의 현존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그저 소수만이 그를 따랐다'는 말도 자기실현의 기회는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으나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에 해당되는 말이다.

자기실현(개성화)을 통하여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이 되면 개체의 고유성을 소홀히 하거나 억압함이 없이 인간의 집단적 사명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보다 충실하게 충족시키게 된다. 자기실현(개성화)에 관한 융의 다음과 같은 정의에 나오는 '개별적 존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개성화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개성이라는 말을 우리의 내적이며 궁극적이고 다른 것과 비길 수 없는 고유성(일회성, 유일무이성)이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본래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개성화는 자기화 또는 자기실현이라고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부영, 『자기와 자기실현 - 분석심리학의 탐구 3』(한길사, 2002), pp. 94-95.

윗 글에서 융의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전체와 하나 됨'이 전제되고 있으므로 메마른 낱알처럼 흩어지는 서구적 개인주의자가 되는 것으로 곡해해서는 안된다. 아무튼, 난 교수가 되지 않음(또는 못함)으로써 나의 "개체의 고유성을 소홀히 하거나 억압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고, 그러함으로써 "인간의 집단적 사명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보다 충실하게 충족"시키며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번역하자면, '내 생긴 꼴 그대로를 살리며 살 수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내게 맡겨진 소임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구체적으로, 내 맘대로 활동하고 공부하며 살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더 잘, 더 열심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헌데 실은 이 말은, 내가 이~만큼 잘 하고 있다는 취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지 않았더라면 이만큼도 못 했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내가 개성화를 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바꿔 말해서 내가 개성화 하지 못했더라면, 대학 교수가 돼 버렸다면―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다들 열심히 노력하여 그리 돼듯이―, 나는 젊은이를 가르치는 나의 사회적 소명을 지금만큼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을 것 같다. 십중팔구, 버리지 못하는 소인배 기질을 신나게 발휘하여, 교수의 혜택을 누리고 교수의 권위를 휘두르느라 바빴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소인배에게 지위와 명예가 주어졌더라면 그 꼴이 어느 지경이 됐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 그러고 보면, 내가 마주치는 대학 교수들께서는 다 교수가 될 만 한 자질을 함양한 분들이라 훌륭한 교수로서 소임을 다하실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아직 덜 떨어졌고, 제 멋대로이고, 그래서 교수와 같은 훌륭한 사회적 직분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학생들에게 강의하러 가는 매 시간이 고맙다. 교수가 아닌데도, 학교 일 하나도 하지 않고, '연구 실적' 스트레스 하나도 없는 게으른 인간임에도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는 고귀한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하루 하루, 수업을 영광된 소명으로 받들고 강의실로 향한다. 그깟 돈 몇 푼 받지도 못하는 시간강사 일을 "영광된 소명"입네 호들갑을 떤다고 여길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영적인 '나'는, 또는 나의 영성은 실제로 이 일을 영광된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곰곰히, 또 곰곰히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교육은 서비스 업이나 수익성 사업이어선 안 되겠다 싶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가르친다는 행위가 학생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성을 감안할 때, 교육은 성직일 수밖에 없겠다 싶다. 학생 가르치는 일이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라 보기에, 이 일로 돈을 잘 못 벌어도 불만은 없다. 돈은 다른 일로 벌면 된다.

하여, 나의 게으름이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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