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좋아 (2009/9/12)
©
Suk Hoon Han
신학기가
됐다. 각 대학마다 박사학위 없는 시간강사들이 대량해고 됐단다. 비정규직인
그들을 2년 넘게 고용할 경우 대학 측에서 그들의 지위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주도록 법이 바뀌었기 때문에 아예 자르기로들 결정한 것이다.
알량한 시간강사 자리나마 졸지에 잃은 그들은 앞으로 무슨 수로 먹고
살 것인가? 자기실현 따위를 외칠 곳이 못 되는가, 이 나라는? 사람
명줄이 달린 문제거늘, 신경쓰는 기득권자도 거의 없는 듯 하다.
나는
강의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박사학위 소지자는 노동자가 아니어서 정규직
전환 혜택의 대상이 못되기 때문에 잘리지 않았다. 그리고 쫓겨난
강사들 수업까지 떠맡게 된 것이다. 서울 시내 여러 대학을 전전하며
일주일 내내 강의하다보니 영낙없는 '보따리 장사'다. 행색도 그러해지고
있다―그게 나쁘다거나 어떻다는 게 아니라. 준비할 것도 많고, 정리할
것도 많아 눈코뜰 새없이 바쁘다. 아무튼 간에 남들이 잘려서 결과적으로 내
일과 수입만 늘어났다.
수업의 수와 종류, 출강 학교 수를 놓고
볼 때 '대한민국 대표 시간강사' 정도가 된 듯 하다. 어쩌다 난
이렇게 많은 강의를 하게 됐을까? 비정규직 강사들의 해고사태라는 노동시장의
변화 때문일까? 그게 다는 아니다. 일단 내가 주겠다는 강의를 다 받아들였다,
사양하고 빼고 거절했던 예전과는 사뭇 달리. 나는 왜 주는대로
덥석 강의들을 다 받아들였을까? 그래, 일단 돈이 궁해서다. 돈이 궁해진
것은 내가 주로 하던 번역 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불경기 탓일까...
수업
때문에 밤 늦게 귀가해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 내게 큰딸이 물었다:
"아빠
이번 학기에는 왜 그렇게 수업이 많아? 이제 번역은 안해?"
"응."
"왜
안해?"
"재미없어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나니 알겠다. 내가 하기 싫어서 번역 일을 스스로 끊었다는 것을.
그리고 하고 싶어서 강의를 이렇게 많이 하게 됐다는 것을. 이런 건
직관으로 아는 것이다. 고용시장 변화 때문도, 경기 변동 때문도, 돈이
궁해서도 아니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하게 된
것일 뿐이다. 얼마나 좋아하는가? 일주일 내내 수업 준비 생각만 한다.
그게 제일루 재미있다. 물론 책 쓰는 창작 일도 재미있지만, 지금은
수업 때문에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조금은 아쉽긴 하다.
하지만 놀러도 못 다니고, 등산도 못 가고, 친구들 만나 한 잔 할 시간도
못내고 있는 요즈음이 나는 재미있고 행복하다. 내가 아주 뛰어난 선생은
못되지만, 재미있게 열성을 바쳐 준비하므로 그런대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수업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 외에 더 바랄 건
없다.
나는 내 일을 좋아서 한다. 그래서 행복하다. 이 점이
제일 중요하다, 일을 해서 행복하다는 점이 말이다. 금전적, 사회적
보상 따위 보다도 이 점이 더 중요하다. 친구가 선생 일이 내 '천직'인가보다고
말했는데, 나는 이게 내 소명(calling)인가 보구나 싶다. 실직한 이들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선생 일 할 수 있음이 하늘의 축복이겠거니 싶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 미안하다. 하늘에 감사하는 일이 죄송스러운 일일
수도 있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