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곳

낮은 곳 (2009/6/29)

텔레비전 프로들 중에는 극빈층 가족의 삶을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실로 지독한 가난을 볼 수 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못 배우고 못 익혀,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간신히 생존해가며 어린 자식들을 부양하고 있는 극빈층 부모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 이전에 한숨만 터져 나온다. 동시에 슬며시 나의 일상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귀족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처럼 '밑바닥'에서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처럼 자식들 배를 못 채워주는 '현실'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자식을 먹이려 할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들은 그 '무슨 짓'이라는 선택 자체를 전혀 보유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생존은 이리도 가혹한가. 산다는 건 참으로 두려운 일인가. 그러므로 '능력'이 있는 인간들은 그런 가혹한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가보다. 안간힘을 쓰지도 않고 슬슬 살아가는 자들은 뜨거운 맛을 볼지 모른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닐 테고, 이것은 인문학을 공부한 이들에게는 (나와 같은 '대졸자'들 부류에서만 보자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자고로 부와 권력에 붙어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는 것은 적지 않은 '인문학자'들의 생존 전략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재벌과 언론 등에 기생하는 그러한 이들의 수도 적지 않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유식함을 도구삼아 권력과 재벌과 수구 언론을 비호하고 우민화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허나 그러다가도 술 한 잔 걸치고 나면, '그래,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짓거리들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적잖은 학인들이 '자고로' 권세가에 기생하며 생존해왔다.

참여연대에 관여하던 지인이 해준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국 사회에서 삼성의 힘은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고. 삼성이 입법, 사법, 행정의 삼부에 고루 미치는 어마어마한 영향력은 나같은 국외자 소시민도 쉽게 짐작이 간다. 그런 '초일류 기업' 삼성을 비판하고, 그 삼성이 대표하는 한국의 엘리트주의적 가치체계에 저항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른바 서민을 챙기는 운동가들은 삼성에 대한 반대운동이 어떤 결실을 볼 것으로 전망하는가 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장악하는 데 이만큼 성공한 삼성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시대 상황은 다르지만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많은 비판과 도전에 직면했음에도 그 부귀와 권세가 4세기 동안 이어졌다. 메디치 가의 대를 이은 권력 승계, 예술에 대한 과감한 선심, 정략결혼을 통한 엘리트 네트웍 구축, 공동체 정부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 등은 여러 면에서 삼성과 유사하다. 마치 삼성가(家)가 메디치가를 벤치마킹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아마 '똑똑한' 이라면 일찌감치 이러한 삼성에 붙어서 이익을 도모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앞으로도 몇 수십 년을 더 그 권세가 유지될지도 모르는 상대를 이용하지는 못할 망정, 함부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것은 우둔한 일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걸쳐 서서히 진행되고 있을 '역사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고 삼성 권력을 비판하겠다는 이도 있을런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 고결한 성자는 쉽게 눈에 띄지도 않을 게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볼 때, 삼성과 같은 권세에 빌붙은 학인들은 똑똑한 이들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높은 곳을 우러러 그곳에 매달려 있는 그들은 똑똑한 이들이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심지어 존경도 받으며, 자신의 처자식을 풍요롭게 먹여 살리고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사실 그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그들의 처세에 분노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다 무능력하기 때문에 그들 흉내를 못내는 찌질이들의 감정풀이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권세를 비판이나 하고 앉아있는 나는 찌질이라 치자. 헌데 희안하게도 이 세상에는 그 드높은 권세에 눈돌리지 않고 '낮은 곳'에 임하는 이들이 있다. 눈 크게 뜨고 찾아보면 사실 꽤 많다. 그런 이들의 행위에 공감하는 것을 '현실적'이 아니라고 믿는 이들이 대다수라서 그렇지, 분명히 그들도 우리의 현실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는 동참자들이다―또는, 우리의 현실의 붕괴를 막아주고 있는 수호자들일지도 모르고. 나의 길벗님들 중에서만 꼽아보더라도, 한 분은 소위 삼류 대학의 학생들이 자존감을 갖고 떳떳이 세상을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온 힘을 다 바친다. [Y교수님, 술 살 때가 돼간다는 무언의 압력 절대 아님.] 또 다른 분은 공업 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배움의 의미를 깨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여생을 건다. 이 분들은 대학 교수님들로서, 괜히 힘들게 그런 일 할 것 없이 골프나 치며 편하게 지내도 되는 분들이다. 그런데도 그런 힘든 일들을 한다. 스스로 택해서 낮은 곳으로 간다. '삼류대' 학생들과 공고생들에게 다가가는 이런 교육자들과 메디치 가의 권세에 빌붙는 지식인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전자는 우리 사회의 관심을 못 받는데 반해, 후자는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다는 차이점이 있기도 하다.)

위 두 분 길벗님들의 청을 받아 감히 내가 '특강'을 하러 그분들의 학교들을 찾아갔던 일이 있다. 얼마 전의 특강차 방문 때, 존경하는 길벗님께서는 '하위 10%를 위한 HRD(인적자원개발)'라는 개념을 일러 주셨다. 나는 십년 전쯤에 미국에서 돌아온 이래로 우리나라의 교육계와 교육학계에서 그토록 파워풀한 개념을 접해본 기억이 없다. 학교 성적 최하위 10%를 구하기 위한 교육 방법이라니! 정부와 교육계와 학부모들이 다 함께 얼이 빠져서 상위 1%만을 위하고 1%만을 추구하는 짓거리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이 때에, 저 밑바닥 10%에 속하는 좌절하고 있는 영혼에 다가가려 한다는 것은 ... 지금껏 접해온 국내 학계의 이른바 석학님들의 그 어떤 화려하고 정교한 언설 보다도 그분의 그 말씀 하나가 내 가슴속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낮은 곳'에 임하는 것 잘 할줄 모른다. 늘 대하는 서울의 명문대생들이 편하고 수도권의 '중산층' 집안 아이들이 편하다. 그런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을 대할 때 적지 않이 헤맸었다. 특히 군 복무 때 만났던 '양아치' 부류의 친구들이라든가, 이십대 후반에 상대했던 가난한 친구들은 처음에는 어떻게 대해야 좋을지조차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으며 나의 사회경제적 계층에서 벗어난 친구들과 소통하는 법을 조금씩 익히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때문에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밥맛 없는' 인간으로 기억될 것으로 추측한다. (허나 돌이켜보면, 내가 그토록 거리감을 느꼈던 그 친구들 중의 어느 한 명도 나를 '밥맛 없는' 인간으로 대해주지 않았고, 장기간의 시점에서 볼 때 그 친구들이 내가 평소에 잘 아는 엘리트 계층 일원들 보다 훨씬 더 인간미 있고 따스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됨이 씁쓸하다.)

내가 낮은 곳에 잘 다가갈 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몸소 실천하는 이들이 존경스럽다. 나 스스로도 못 하는 일을 '삼성 장학생'들이 안 한다며 손가락질 하는 건 한 마디로 말도 안된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먹고 살기 위해 길을 찾아가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감정은 실은, 수준이 매우 낮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유치한 감정과는 별개로, 짚어두고 갈 점들은 분명히 있다. 우리가 '높은 곳'을 얼마든지 추구할 수 있다. 높은 곳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는, 높은 곳의 지위와 경계를 유지하려는 탐욕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면서 그에 따라 낮은 곳을 억압하게 되는 데 있다. 삼성을 찬양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삼성의 영역에 흠집을 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낮은 것들의 반발을 혹독하게 짓밟게 되는 것이 문제다. 이런 것들은 구체적인 악업의 발생을 뜻한다. 그래서 유치한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영성의 입장에서, 나는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며 곡학아세하는 이른바 '현실주의자' 학인들을 연민한다. 어쩌면 그들은 나같은 종류의 아둔한 인간들을 '찌질이'라며 연민할 지도 모르지만, 뭐 그건 상관없다. 애시당초 가진 명성과 권세가 없는 인간을 깎아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니까.

'높은 곳'에 빌붙어 생존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는 것은 근세 유럽의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특질과 흡사하다. 부르주아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돈을 선택했다. 부르주아든 뭐든, 한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잘 먹고 잘 살면 그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인문학 공부를 하는 이들의 삶의 선택이 그러하다는 것이 사회 전체를 볼 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겠다. 굳이 그람쉬나 루카치 류의 좌파적 지식인 개념을 들출 필요는 없다. 단지, 공부한 학인들이 삶의 총체성을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축소시켜 버린다는 것이 사회 전체와 공동체의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많다. 특히 그 학인들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곳에 빛을 비추는 소수 교육자들의 성업(聖業)이 '생존의 두려움'이라는 만연된 의식에 의해 발목 잡힘을 당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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