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2009/1/4)
©
Suk Hoon Han
2009년의
첫 달은 호주의 멜버른에 와 있습니다. 이곳은 대체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 합니다. 멜버른 시내 구경도 좀 했지만, 동생네 집 주변의 습지 공원을
더 자주 찾았습니다. 첫째 딸 시시는 엄마와 고모를 따라 쇼핑몰
구경 다니는 동안, 둘째 나나는 사촌과 함께 아빠와 습지 탐험을 여러
번 나섰습니다. 다양한 수종과 조류를 자랑하는 습지 공원 깊숙이 들어가
있노라면, 제가 평소 참 자아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주요 전제 조건
중의 하나로 강조하는 '호연지기'의 시동이 걸립니다. 자연은 때로 냉혹하고
거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대지의 여신의 품안에 안겨 있는 평온을
안겨줍니다. 동생 집에 기숙기식하며 호주 대륙 최남단의 풍광을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계획하고 준비해온 여행이어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감행했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호주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적지않은 난관들이 있었으나 대체로 해결할 수 있었고,
저는 이곳까지 돈벌이 일감들을 노트북 컴퓨터에 잔뜩 싸짊어지고
와서 계속 노동을 해야 했지만, 덕분에 여행비용도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돈이 많아서 쉽사리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면, 이 여행에 대해
느끼는 개인적 감상의 가치가 덜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미국에서
10여 년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이곳 호주를 며칠 본 것만으로 어떤
평을 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주류가 앵글로 색슨 백인이고 그밖의 다양한
인종이 공존한다는 점이 미국과 비슷하지만, 분위기랄까, 어떤 기운이나
향취랄까, 하는 점에서 호주의 대기는 독특함을 품고 있습니다. 확실히
사람들도 미국인들과는 다른 느낌을 전합니다. 호주에서 살아본 여러
한국인들에게서 들은 바와 같이, 매제(妹弟) 역시 이곳이 살기
좋은 곳이고, 따라서 이주해와서 살 만한 곳이라고 역설합니다만, 저는
아직은 이렇다 할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저와 일로 인연을 맺은
이들은 저를 매우 코스모폴리탄한 인간으로 간주하곤 하지만 - 번역,
통역을 주로 하기 때문에 -, 저는 저 스스로 느끼기에도 의외로, 비좁은
한반도에 대한 애착이 완고한 편입니다. 아마 제 고향의 땅을 편애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인간들이 감수해온 현실의 고난에 대해 눈감고
있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뭐, 그저 그런 정도의 애정만 있다는 말일
뿐, 저에게 동족을 위한 보살행에 대한 드높은 소명의식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만.
남반구의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예상 밖으로
쌀쌀한 멜버른의 날씨 탓에다가, 침대를 처자식에게 내주고 바닥에서
잠을 자기 때문인지, 매일 밤 숙면을 누리지 못하고 많은 꿈에 시달립니다.
헌데 그 꿈들 중에는 적극적인 해몽을 요청하는 것들이 간혹 등장합니다.
예컨대, 내가 꽤 고급스럽고 규모도 상당한 서점의 책임자가 됐는데,
그 서점 한복판에 널찍한 유리판이 수직으로 서있고, 그 유리판 위에는
북구유럽의 신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성과 정령 등에 대한 내용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이 서점을 맡게 된 나에게 누군가가, 그
'간판'과도 같은 유리 위에 게시된 내용과 서점이 소장하고 있는 책들의
내용 사이에 'match'가 결여돼있다고 지적을 해줍니다. 나도 그 지적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깨어나서 생각해볼 때, 겉의 간판과 속의
내용의 불일치에 대한 지적이 딱히 위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진행시키는 무언가를 겉으로도 일치되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조언해준
것이라는 판단이 섰습니다. 좀더 확대해석 해본다면, 내가 내면에서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이 삶속에서 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을 품고
있다면, 그것을 나의 외면에도 똑같이 게시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글세요, 좀더 대담하고 노골적으로 나의 초월적 추구를
나의 교육과 집필 활동 등에 반영시키라는 메시지일런지...
제가
신과 첫 대면을 했던, 제 일생 최대의 사건이 일어난 지 딱 십
년이 돼가고 있습니다. 그 십주년 기념일이 다가올수록 저 자신에게
질문을 자꾸 던져보게 됩니다. 지난 십 년의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제한된
자아 너머의 무한한 '나'의 가능성에 눈 뜨게 된 이후에 나는 과연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 마디로 수행의 삶을 재평가해보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재평가의 점수가 아무리 낮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행을 하는 삶 자체가 수행을 알지도 못하는 삶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내가 수행하여 나를 찾기
위하여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고 사는 것 자체로 수행자로서의
최소한도의 자격요건은 충족시키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 자신의
지난 10년 세월에 대한 자평이 지나치게 박하지는 않습니다 - 인격의
성숙도와 존재론적 깊이에 있어서 별로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이런 낙관성과 자신에 대한 부당한 관대함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