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가을의 산책 (2009/11/15)
©
Suk Hoon Han
오후
네시 전에 강의는 끝났는데, 저녁 때 시내에서 벗들과 약속이 있어서
두어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마침 나의 모교 강의였다. 모교에는 어디
엉덩이 붙이고 앉아 쉴 만 한 곳도 없다. 다른 대학들에는 휴게실과 책상도
있고, 컴퓨터와 복사기도 다 쓸 수 있는데 유독 모교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몇해 전에 부푼 감회를 안고 모교에 첫 출강한 이래로
불평만 쌓여간다. 귀한 젊은이들 가르치라고 나같은 논다리를 불러준
데 대해 고마워하지는 못할 망정.
어디 비비고 앉아서 책 볼
곳 찾으러 다니기도 싫고 해서 걷기로 했다. 마침 날씨도 좋고, 11월
중순의 찬 바람이 마음에 들었다. 네시 경이면 서서히 지상에 퍼지는
황금빛 겨울 햇살의 분위기를 나는 좋아한다. 귀향을 종용하는 듯한
그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나는 머나먼 땅으로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헌데 서울 시내는 걷기에 그다지 좋은 장소가 못된다. 소음, 매연, 인파.
그때 문득 창경궁이 떠올랐다. 약속 장소와도 가깝고 워낙에 내가 잘
아는 그곳을 이런 시각에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듯 했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금세 종묘 입구에 도착했다. 천 원짜리 입장권의 판매 마감
시각 5분 전이었다. 종묘에서 구름다리를 타고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길을 나는 어릴 적부터 몇 번이나 왔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입장권을
내고 종묘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직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다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 수는 줄었다. 오래 된
나무들이 많다는 점이 이곳 고궁들의 크나큰 매력이다. 비록 울타리를
넘어 들어오는 도심의 소음이 차단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심
한복판에 이만한 넓이의 자연 정원이 있다는 점은 큰 다행이다.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내가 몇 살 때쯤에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소풍, 백일장, 사생대회 등으로 줄곳 오기도
했지만, 특히 나는 유년기를 당시 '창경원' 앞 동네에서 지냈었다. 우리
집은 한강 이남의 노량진이었지만, 동생을 낳고 키우느라 힘드셨던 어머니를
위해 외할머니께서 이곳 원남동의 외갓집에 나만을 데려오시어
몇 주일씩 돌보곤 하셨다. 또 외조모께서 창경원의 관리자 한 분과 친척
관계여서 그곳을 늘 무료 입장하셨고, 덕분에 나는 창경원 동물원을
집앞 뜰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나와 같은 행운을 갖지 못한 수많은
그 동네 꼬마들이 창경원 담을 기어올라 몰래 잠입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시절로부터 사십 여년이 지난 지금, 창경궁의 겉
모습은 많이 바뀌었으나, 나는 작은 언덕과 구부러진 비탈길들을 많이
기억해낼 수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곳은 고궁 한쪽 구석의 사슴
우리였는데, 나무가 많은 그곳의 사슴들은 매우 평화로워 보였었다.
이제 사슴은 사라졌으나 아름다웠던 숲은 더욱 원숙해져서 11월의 단풍은
어느 명산 못지 않은 화려한 색조를 뽐내고 있었다.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건너온 나는 그다지 회상에 많이 빠져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갑자기 떨어진 기온 때문에 옷깃을 여며야 했고, 11월의 차가운
초저녁 바람을 피하느라 따스한 유년기의 추억에 잠겨있기는 어려웠다.
수십 년 전, '수정궁'이라는 위락시설이 자리잡고 있었고 노젓는
보트와 케이블카마저 가로지르던 연못가를 거쳐 단풍나무
숲속 길 안으로 들어선 후에야 찬 바람이 잦아들었다. 그 숲길은 과거에
벚나무들이 도열해있어서 봄이면 시민들이 돗자리 깔고 앉아 벚꽃놀이를
즐기던 행락지였다. 나는 요즘도 일본인들이 벚꽃 철에 공원에서 돗자리에
앉아 술 마시며 노는 장면을 텔레비전에서 보면 향수를 느끼게 된다.
창경원의 벚나무는 전부 뽑혀버렸고, 사슴과 더불어 모든 짐승들도 빠져나간지
이미 20년도 넘었다. 선조의 왕궁에서 벚꽃놀이의 낭만을 지속하기에는
이 땅의 역사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사람이 만드는 사람의 역사가
어떤 굴곡을 만들며 지나갔던 간에, 언제나 남아있는 자연은 변함이
없다. 나는 단풍나무 숲속에서 평화로웠다. 나는 물론 나의 삶에서 '인간'을
지향하지만, 인간 세계의 평화를 구하지만, 이럴 때에는 타인이 필요치
않다. 아무도 없는 자연 속에 혼자 있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혼자
있는다는 것은 오직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무 말 없는 나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편할 때 나는 평화로운 존재다. 오직 자신과 1:1로 대면하는
것이 편안할 때 나는 나 자신과 화해한 존재다. 과거에는 나와 독대하는
것이 불쾌했고 싫었던 때가 적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 편해서 평화에
이를 수 있으니, 내 삶은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간밤
꿈속에서 나는 어떤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내게는 내용이 빼곡히
적힌 공책이 있었는데 나는 그 선생의 강의 내용이 죄다 그 공책 어딘가에
적혀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7월 어느 날의 강의
내용을 되짚어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나는 공책 페이지를 넘기며 그
날짜의 강의 노트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넘겨봐도 그 날짜 분은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 누락됐을 수도 있겠다 싶어 한쪽
귀로는 줄곳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간접적으로
들은 강의 내용은 그 핵심이 '제멋대로 하라'였다. 나는 끝까지 그 날짜
분의 노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선생의 강의도 제대로 다 접수하지도
못했다.
새벽녘에 잠시 잠이 깨어 그 꿈에 관해 따져봤다. 선생이
되짚어주겠다던 7월의 그 날은 바로 내 생일 전날이었다. 내 공책은
내가 지성을 이용하여 파악해낸 세상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었다. 그
공책에서 찾을 수 없었던 내용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어진 선험적
지식이었을 게다. 내 공책에는 적혀있지 않은 선험적 지식은 '제멋대로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었다. 분석심리학 식으로 말하자면 선험적 지식의
명령은 나의 참 자아(self)가 보내는 메시지일 수도 있다.
내가
내멋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다. 기껏해야 평일의
늦은 오후에 혼자 고궁을 거닐 수 있다는 정도. 내멋대로 할 수 있는
일의 영역을 외물(外物)에서 찾지 말고 내면에서 구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난 주에 끄집어냈던 질문인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동행을 다시
다뤄볼 필요가 있겠다. 내가 (나의 내면의) 악마를 만났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의 악마와의 대면이라는 체험이 수반하는 허무할 정도의
깊은 고통과 좌절감은 심리적 자학이 아니었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악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신 신에게 감사한다. 그 체험은 귀한 선물이었다―내가
내 안의 선을 깨달을 수 있었던 체험 못지 않게.
출강하는 대학
한 곳의 유명한 인문학자 한 분이 여제자와의 성추행 논란에 휘말려
학교를 떠나고 법정 투쟁까지 겪다가 그만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작고하기 얼마 전이 돼서야 성추행 무혐의 판결을 받았고, 자신을 공격했던
학생 단체들의 사과를 받았다는 것이다.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평생 공부만 했던 그 점잖은 노교수의
말년에 왜 그런 험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에게 다가온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의 깊은
영혼의 부름에 응한 것이었을까? 그는 죽기 전에 극심한 배신을 겪고,
자신의 박해자를 용서해주는 기회를 가졌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죽어가는 노스승에게서 용서받고 참회한 젊은이들에게는 어떤 심오한
내적 변화가 일어났을까?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적인 커리큘럼의 핵심 과제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겉보기에는 말년의
저주와도 같이 보였던 그 교수의 경험이 그의 삶의 레벨을 한 단계 올려준
축복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메피스토펠레스는 결국 어두운 가면을 쓴
채 축복을 감추고 다가오는 천사에 다름아니겠는가.
이런 논지에서
나는 내가 겪었던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조우'를 축복으로 믿는다. '믿음'과
'자기합리화'를 구별하여 논하기는 어려운 일이겠다. 결국 자신의 믿음을
타자와 나누려는 기도 그 자체는 언어를 통해 사회적으로 표출될 수는
없는 범주의 욕구일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타인들이 나의 삶의
행위들을 자기합리화로 보건 말건 간에, 나는 내멋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내멋대로 믿고 계속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나는 꿈에서
받은 것일까? 이건 백퍼센트 믿지는 못하겠다.
창경궁을 나와
천천히 약속 장소로 향하던 나는 원남동 로터리에 다다라서 다시금 유아기의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곳이 외조모의 손에 이끌려 다니던 나의
원초적인 성장 무대였다. 많은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뇌리를 스쳤다.
나는 잠시 방향을 틀어서 횡단보도를 건너 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다소 과장하자면, 그 골목이 나를 잡아 당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골목을
오십여 미터 오르고나니 그곳이 바로 외갓집 집터임을 알 수 있었다.
찌그러져가던 판잣집이던 외갓집은 사라졌고 그 터에는 작은 빌딩이
들어섰으나, 그 골목길과 주변의 오래된 주택들, 철제 대문과 시멘트
담장 등은 사십 년이 넘도록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철제 대문 앞의
콘크리트 계단 위에 함께 앉아 내게 삼립 크림빵을 반으로 뚝 잘라 건네주던
계집아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애의 용모와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유년기 추억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기 전에 그곳을
떨치고 나왔다. 너무도 많은 묻어뒀던 기억 조각들이 쏟아져 나와 두뇌
기능을 교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약속 장소로 향해야 했다.
일 때문에 타국으로 몇 해 동안 떠나있게 된 오랜 벗에게 술을 따라줘야
했다. 가장 가까운 벗들인 고교 동창생들 그들도 제멋대로 살고 있지는
못한 듯 했다―사회적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의무와 책임이 꽉 짜인
세속의 삶에서 메피스토펠레스와의 조우와 같은 내면의 모험을 발동시켜
보려는 의지를 내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은 누구의 삶에든 제공되는 인생의 기본 프로그램일
듯 하건만.
가을은 깊어가고 있고, 1차로 소주 여러 병을 비운
벗들은 도심의 찬 바람을 헤집고 걷다가 2차로 맥주집에 들어갔다. 결국에
꽤 많이 술을 마셨지만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다. 한 시가 넘은 집앞 길가에는 단풍 잎사귀가 셀 수 없이
흩뿌려져 있었다. 새벽 여섯 시경에 집을 나섰으니 거의 이십 시간 만에
귀가한 셈이다. 열심히 강의했고, 깊숙이 가을 낙엽을 밟았으며, 더
깊숙이 원초적 유년기를 탐험했고, 순수하게 벗과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11월의 하루를 내멋대로 잘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