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말의 낙서 (2009/11/27)
©
Suk Hoon Han
1.
언제부터인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자는 생각에 겉치장에 신경을 덜 쓰기로 했다.
워낙에 옷가지에 별로 신경을 쓰는 편도 아니지만, 십수 년 입은
낡은 옷을 바꿀 생각 않고, 이발도 잘 안 하고, 면도도 며칠 씩 안 하며
다닌다. 대학에서 강의하기에 부적절하지 않을 만큼의 예의만 차린다.
굳이 청빈한 훈장처럼 보이려 함도 아니다. 그냥 생겨먹은 대로 편하게
살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잘나보이려는 욕구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옷차림 뿐만 아니라 직업적 전문성, 지적 모색, 영적 추구, 도덕적
수준, 인격적 조화, 심리적 안정성 등등 모든 면모에서 잘나보이려는
헛 노력을 멈추려는 것이다. 그래서 직업적으로 허덕이고, 지적으로
헛점 투성이고, 영적으로 투쟁중이며, 도덕적으로 흠결 많고, 인격적으로
미숙하며, 심리적으로 들쑥날쑥한 그 본 모습들을 감추지 않고 살아보려
한다. 이것도 수행이다.
행색이 남루한 탓일까, 다니면서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한다. 대학의 젊은 직원들의 무례함을 몇 차례 겪고보니
제기럴, 다시 예전처럼 말쑥하게 넥타이 묶고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회적 지위가 별 볼일 없는 탓일까(비정규직),
일의 관계 속에서 함부로 취급되기도 한다. 일 때문에 인연을
맺은 이들의 천대를 여러 번 겪다 보면 젠장, 애시당초 교수되길 포기한
내가 병신이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자조는 비겁함에서 기인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사회경제적으로 저 높은 경지를
겪으면 겪을수록 영적으로 천박해지는 경향이 있는 반면, 사회경제적으로
저 낮은 처지를 겪으면 겪을수록 영적으로 겸허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수행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정신의 좋은 자양분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었지.
2.
영화 '친구'의
조폭 보스 역할을 맡았던 내 또래 배우의 이야기를 인터넷에서
읽었다. 낮은 곳에서 겪었던 진한 고뇌가 느껴졌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여기다 퍼다 논다:
[배우]
이재용은“영화 ‘억수탕’‘닥터K’로 큰 실패를 맛본 곽 감독이 어느날
‘친구’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왔다. 머리를 빡빡 깎고 비장한 각오로
왔다. 내게 극단 사표를 내라더라. 곽 감독은 이번에도 또 망하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과장사를 해야 한다고 했고 그 말이 너무 울컥해
결국 사표를 낸 후 ‘친구’에 출연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윤현진 기자, www.newsen.com
3.
지난
주 꿈속에서 어떤 남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내 책 '유진의 학교' 한 권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책의 표지가 놀라울만큼 세련되고 예뻤다.
내심 원래의 소박한 표지가 너무 싸구려 같다고 여겨왔었던가 보다.
제 외양은 잘 다듬지 않으면서 제 책 표지에 대해서는 미련이 남아 있었던가
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 책이
문화체육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됐다고 축하해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몇 백만 원 어치 구입해서 전국 도서관 등에 배포해줄 것이라
했다. 예지몽을 꾼 것 같다. 꿈에서 책 표지가 고급화된 것은 책의
사회적 평판, 즉 외적인 면이 향상될 것을 앞서 알려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아주 약간, 책이 더 팔릴지도 모르겠다. 워낙 팔릴 만한
내용의 책도 아닌 듯 싶으니 기대를 접고, 둘째 책이라도 매혹적인 겉표지
속에 센세이셔널한 내용이 담긴 것으로 내야 할까 보다. 그래야 좀 팔리지.
그래야 수입이라도 좀 생겨서 계속 창작을 할 수가 있지.
4.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찬물로 세수할 때 삶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낀다. 이
끈이 너무 팽팽하게 당겨져서 툭 끊어지고 말 경우, 삶이라는 현실도
무너져내리고 말 것이다. 차가운 아침 공기 속의 차가운 물. 겨울 새벽에 정신이
번쩍 들 때,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 본능'이 뇌리를 스친다. 젊은 시절의 죽음
본능에 대한 날카로운 감지가 나를 결국 수행의 길로 밀고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행은 삶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줬다. 죽음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삶에 대한 사랑의 싹이 텄다는 것은 역설이다. 삶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죽음과 종이 한 장 차이로 이어져있을 테니까.
한 훌륭한 미국의
스승이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청중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을 들었다: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뭘 할 것입니까? 당신이
받은 그 모든 은총, 재능, 실력, 힘, 영향력, 매력, 창의력, 돈,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말입니다."
나는 내 옷차림과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그 모든 것들을 쓰려 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나 자신으로서 있는 일에 그 모든 것들을 쓰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