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값 (2009/5/6)
©
Suk Hoon Han
나는
내가 맡은 일에 대한 돈값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니고 산다―고
믿고 산다(기억을 뒤져보면 몇 차례 합당한 돈값을 하지 못했던 경우들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대학에서 강의하는 일을 결코 대충 하지 않는다.
준비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내가 하는 여타 일들에 비해서 특히
이 일(교육)에 대하여 돈값에 대한 의무감이 더 강한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성직으로서의 교직이 보수에 합당한 노동을 제공하는 '서비스
직종'의 정신을 넘어서서, 희생을 당연시하는 헌신을 요청한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기존 시장경제체제의 '패러다임' 안에 자리매김해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또, 나는 교직이 성직이라고 믿지만, 성직은
(사회경제적) 성역의 파괴를 즉, 특별 대우의 파괴를 요청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대학 시간강사의 열악한 보수와 처우에 대해 분개하고
비판하지만, 나는 그 분개와 비판에 동참하기를 신중하게 주저한다.
물론 구조적 불의를 미워하는 수오지심을 거두고자 함은 아니다. 매우
개인적인 주장이지만―영적인 차원에서―, 시대의 희생양이 되는 것까지도
성직의 의무사항에 포함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처세론의 대가로 '세이노'라는 인물이 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성공론의
옹호자인 세이노를 나는 높이 평가하고 심지어 존경한다―특히 이론적
'자기계발 전문가'들에 비하여. 평소에 '영성' 운운하는 나의 이러한
태도에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지만, 영성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깃들어
있다는 교조적 믿음을 고수하는 나로서는 돈 많이 벌어 성공하는
일의 전문가를 경원시할 까닭이 없다―다만 나는 그와는 스타일이
달라서 안빈낙도라는 삶의 옵션을 계속 옆에 끼고 살아갈 뿐. 아무튼
세이노가 어디엔가 쓴 글 한 편을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그는 보수에
합당할 만큼만 노동을 해서는 결코 앞서 나아갈 수 없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었다. 극구 동의한다. 주어지는 돈값을 뛰어넘는 수고를
바치는 이들이 자신의 업종에서 성공하는 사례가 생각보다 매우 빈번하다는
점을 인생 속에서 관찰해오고 있다. 대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이처럼 자신의 권익을 희생해야 할진대,
하물며 '성직'에 종사하는 이들이 돈값도 못해서야 어디 체면이 서겠는가.
덧붙이자면, 성직의 '성공'은 명예와 돈에 있지 아니하다: 성직의 성공은
'잘' 돕는 데 있다. 나는 성직(교직)에 종사하는 이들 중 돈값도 못
하는 이들을 볼 때 화가 치민다.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의 한
부분에 대한 화냄이었을 수도 있다. 나는 여러 대학에 출강을 해왔는데,
한 번은 어떤 대학에서 첫 달 강의를 하고 입금된 강사료를 보니,
내가 출강하던 타 대학들에 비해 현저하게 금액이 저렴한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어깨가 축 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두 딸을 키우는 나로선
매달 말 지불해야 할 금액이 만만치 않다. 그때 '아, 착취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약 한 시간 동안, 다음 학기에도 그
학교에 계속 출강을 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심을 했다.
과거
8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미남 배우 미키 루크가 한 때
헐리우드의 퇴물 취급을 받다가 최근에 은막에 복귀하여 정신 깊숙한
곳을 울리는 명연기로 재기에 성공했는데, 그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쏙 들어와 국문으로 옮겨 봤다:
[Mickey
Rourke] "다른 감독들과는 아주 잘 해왔는데, 만약에 내가 돈만
바라고 연기를 했다면 연기가 나를 져버렸었겠죠. 사람이 돈 쓸 일이 많아지면
말이예요, 싸구려 작품이라고 할 만한 영화에도 손을 대게 돼요. 그렇게 되면 그냥
나 자신이 싫어집니다. 바로 그랬을 때 내가 진짜로 자기파괴적이 되기
시작했어요.[마약,
등등으로] '할리 데이비슨과 말보로 맨', 그게 자학의
시작이었죠."
-
Time, 2009.2.16.
퇴물
프로레슬러 역할을 맡아서 당당히 돌아온 미키 루크의 고귀한 영혼이
그의 고백 속에 깃들어 있는 듯 하다. 나는 '성직'이 어쩌네 떠들고
돌아다니면서도 내 일에 주어진 돈의 액수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내
일을 소외시키고, 내 젊은 학생들을 소외시켰다. 그때 대단히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고,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만회하기 위해 결국 돈
더 많이 주는 대학들의 수업에 쏟는 것보다 더 공을 들여 수업에 임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까지는 제 자랑이라 하겠다.
작년에 재정적으로
꽤 어려웠을 때, 이른바 '대치동' 학원에 나가서 돈벌이에 몸을 불살라
볼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수업을 맡기 직전까지 갔으나 최종적으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원 강단에 서는 일은 무산됐다. 당시에 계약 등의
건으로 몇 차례 그 학원에 들락거렸었는데, 전철 역에서 내려 학원까지
가는 그 길이 내게는 지독히도 암울했었다. 대치동 학부모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는 학원 안에서는 질식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드디어 돈에 팔려가는구나' 하는 기분이랄까 ...
해가 바뀌어,
오직 돈 때문에 지식을 파는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음에 매우 감사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 '선명성'은 오히려 역겹다. 내심 많은 돈을 벌고
싶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안빈낙도를 동경하는 위선적 심리가
은닉돼있기 때문이다. 물론 '위선적 나'로 인해 괴로워할 만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내가 순수하고 젊지도 않다. 나의 위선성에
대해서는 워낙에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돈 때문에
지식을" 팔며 살아가야만 하는 숱한 '가장'들을 그 누가 감히 손가락질
할쏘냐. 우리는 누구나 다 성스러운 자기실현의 여정에 동참한 길벗들이
아니겠는가.
양시양비론이랄까, '케세라 세라'랄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비판정신의 예봉 따위 누그러져버린 듯한 나의 태도는
다 노화의 증거일 수 있겠다. 그렇다 해도 인간사에서 막강한 위력을
지닌 돈이 나에게 이만큼씩 주어지는 것에 다 내 영성이 허용하는 합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나는 믿고 살아간다고 뇌까리련다.
그리고
오늘도 '돈값' 이상을 하기 위해 신나게 학교로 달려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