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수행 (2009/12/6)
©
Suk Hoon Han
1.
프랑스에는
고등교육 기회를 계층적 차별 없이 제공하기 위해 저소득층 지역 출신의
젊은이들을 최상류층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대학의 학생으로 선발해주는 대입
특별전형
제도가 있다고 한다. 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상류층 출신 대학생
한 명이 자신의 학교에 다니는 저소득층 출신 학생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로부터 삶의 진정한 가치에 관해 배울 수
있었다'라고.
글세, 아무래도 돈 많은 계층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삶의 진정한 가치와
같은 것을 추구하는 부자 개개인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러나 부자들에 대해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다음과 같은 '심한' 말을 했다: "부유함에 따르는 벌칙이 있으니 그것은, 부유한 자가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 보통 사람들의 경험, 그리고 보통 사람들간의 친교로부터 배제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부유하기 때문에 그 부자는 거대한 인류 가족의 일원이라는 태생적 권한을 자동적으로 박탈당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에 대한 헤겔, 루소 등의 비판을 고스란히 계승한 듯한 평가다.
서울의 강남구는 전국에서 가장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적십자비 납부율과 쓰레기 수거율이 전국 꼴찌라고 한다. 국민들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부자들보다는 벌이가 시원찮은 서민들이
더 많은 성금을 낸다는 방송 보도도 여러 번 봤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고소득층의
인간성이 더 메말라 있고 이웃에 대한 긍휼심이 더 적다고 결론을 내릴 만
한 충분한 근거 자료를 갖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나 자신이나
살펴보기로 한다. 과거, '지성'이나 '이상' 같은 개념을 멋있어 보인다고 여겼던
청춘기의 나는 따스한 심성의 소유자라고 하는 일반적인 서민 보다는 메마르고 차갑다는 강남 주민
쪽에 훨씬 가까웠었다고 자평한다. 예전에는 경제사정이 꽤 괜찮으셨던 부모님 덕에 미국도 다녀오고, 젊었을
때엔
돈도 잘 벌다보니, 하루 하루를 생존하기 위해 영혼을 바쳐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도는 지극히 이론적인 수준에 그쳤다. 이기적
자기보존 본능과 페르조나(사회적 자아, '가면'으로서의 나) 구축 의지에 이해 이끌리고
있었던 청춘기 나의 삶은 이웃과 동고동락하는 '삶의 진정한 가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여전히 나는 그다지 서민적이거나 소탈한
인간의 내음을 풍기지 못하는 놈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실질적 소비생활 면에서는
서민적이고 소탈함에도 불구하고. 한마디로, 페르조나가 이끌던 나의 삶은 인간의
본질인 사랑을 몰랐다고 하겠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좋아했던 유일한
뽕짝 가수가 심수봉이었고, 중년이 돼서는 그녀의 '사랑밖에 난 몰라'라는
노래가 좋아졌다는 사실은 어쩌면 자신의 이같은 무지와 결핍을
보상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내가
듣는 거의 모든 음악에는 인간의 음성이 빠져있다. 나는 기악만 듣는다.
2.
소설가 김훈이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 글쓰기는 문학이나 예술이기에 앞서
밥벌이를 위한 엄숙한 노동"이며, 자신은 "생업으로서의 글쓰기라는
세속의 가치와 현세적 질서를 경멸하는 자들을 경멸한다"고.
이
말에 관해 2주일 정도 생각했다. 그래, 나는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겠다.
예전 같았다면 아마도 그의 말에 대응하여 "세속의 가치를 경멸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당신을 경명한다"고 외쳤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다 해야
하는 '생존인'을 부정하는 그 어떤 고귀한 이상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지를 못하겠다. 이런 태도의 높은 경지는 장일순
선생께서
어떤 이의 도난당한 물건을 찾아주고 나서 도둑에게 영업을 방해했다며
사과했다는 일화에서 찾을 수 있겠다. 고귀한 이상이란 것도 '현실'이
충족돼야 제기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세속이 곧 신성이 아니겠는가.
겨우 겨우 처자식을 먹여살리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한 달치 생활비를
버는 속된 일이 지극히 성스러운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다시
자문한다. 걸출한 작가 김훈의 헌신과 문재(文才)와 선언은 존경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2주 동안 생각했지만 또 계속 생각하며 자문한다. '세속의
가치와 현세적 질서'의 비판, 또는 부정은 과연 경멸할 만 한 일인가?
나의 애초의 수행에
일종의 대승적 차원의 지향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세속의 가치와 현세적 질서'의
극복과 초월이었다. 그것은 작금의 세속의 가치와 질서의 총합이 인간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지성적 판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수행을 통하여 나는 세속을 뛰어넘을 만 한 그 무언가를 손에 쥐게
됐는가?
3.
수행은 지난하고, 지리하다.
수행의 길에서 내면의
탐색을 추구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내면이란, 외면의 페르조나라는
소중한 껍데기의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말한다. 껍데기 돌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인생이 분주한데, 하물며 그 안의 것을 돌보기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닐
것이다. 허나 나는 그것을 파헤쳐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성과들과
마주하게 됐다.
이를테면, 이따금씩 술잔을 나누며 서로의 수행을
독려하는 한 길벗께서―수행자가 술이나 퍼먹는다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나의 내밀한 이면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알려준 경우를
들 수 있겠다. 길벗께서는 내게 히스테리 성향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관찰인가? 만약에 그 정도로 나의 페르조나의
이면을 포착해준 이가 여성이었더라면, 나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놀라운 관찰"이라 함은, 내가 평소에
웬만해서는 '히스테리'와 비슷한 면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 길벗께도 히스테리를 부린 적은 없다―내가 술은
좋아해도 주사는 없(다고 본)다. 또한, 나를 잘 안다는 이들 중에도 나의 히스테리를
목격한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나는 인정한다: 내 안에는 히스테리가 있다.
나는
과거에 차 운전 중의 시비로 어떤 이와 멱살을 잡고 쌍욕을 내뱉었던
적이 있고, 아버지에게 맞고함을 치며 대적했던 적도 있고, 내게 잠재적
위험을 유발하고 도망치던 십대 아이들에게 '야 이새끼들아, 거기 못서'라며
소리를 질렀던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내 어린 딸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그렇게 소리를 질렀던 적도 있다. 또한 최근에도 나의 '교육적'
문의를 무시한 대학 행정원에게 '지극히 관료주의적이며 행정편의적
태도'라고 퍼부은 적도 있다. 물론 자주는 아니지만, 히스테리는 내
내면에 잠재돼있다가 이따금씩 이렇게 삐져나온다.
이같은
나의 히스테리성을 스스로 명확히 인식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따금씩 히스테리를 표출함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이 히스테리가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었다. 길벗의 그 말씀을 듣고서야
깨달음이 발생했다: '아, 내게는 히스테리가 있구나!'
이러한
깨달음, 또는 수용은 상상 이외로 나를 자유롭게 해줬다. 나의 속박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영어로 'Liberating Effect'라고 표현할 만
하다. 나는 아마도 의식적으로는 한 번도 나 자신을 히스테리컬한 인간이라고
간주했던 적이 없었던가 보다. 언제나 나 자신을 조용하고, 차분하며,
친절한 인간으로만 여겨왔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나이스'한 이면에는
분명히 히스테리가 숨어 있었다는 점을 이제야 알겠다. 뻔히 있었던
것을 왜 그다지도 몰랐을까? 그건 아마 내가 스스로 모르도록, 의식할
수 없도록 자신에게
압박을 가해왔기 때문일 것이라고 본다. 그 압박을 풀어준 순간, 즉
내가 히스테리컬한 인물임을 인정한 순간, 내게는 예상치 못했던 해방감이
도래했다.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진면목 중에는 히스테리 이외에도 부정적인 성향들이
또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당연히! 차제에 추측해보니, 내게는 관료주의적
완고함, 비정한 인간관계 정리, 그리고 다양한 콤플렉스 방어기제
등등이 풍부하게 내재돼있으리라는 평가가 발생한다. 나는 관료주의적
경직성이 합리성을 압살하는 것을 대단히 증오하는데, 그건 아마도 나
자신의 내적인 완고함이나 고지식함의 투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적잖은
이들이 내게 말해주기를, 좋게 말해서는 내가 주관이 센 인간이지만,
나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자기 고집이 세다고 귀띔해줬었다. 그리고 나는
이해관계가 뒤얽혀 내 마음이 떠나간 이들과 거의 '영원히' 결별한 경우가
몇 번인가 있는데, 이는 유치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넘어서 나의 선천적인
냉정함의 표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나는 숱한 심리적
방어기제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나의
생각으로 간결히 요약된다: '내 자식들에게
내가 짐이 되는 그 순간 나는 세상을 하직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신앙인은 자살을 하면 안 되고 어쩌고들 떠드는데, 난 그런 말들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수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커리큘럼을
내게 제공해줬고, 그 커리큘럼을 통해 나는 예상 못했던 난관들을 통과했으며,
그래서 이제 뒤돌아보며 그런 난관들의 지당한 존재 이유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됐다. 최근의 난관 속의 자기성찰을 통해서도 나의 본래적 모습을 더 많이, 깊숙이 깨닫게 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런 성과는 나를 자유롭게 해준다.
한 주일의 일이 끝난 금요일
밤, 집에서 멍청하게 캔맥주를 따마시고 있다가 텔레비전을 켜니, 그
옛날의 명작 '빠삐용'의 끝 부분이 방영되고 있었다. 국민학생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네 극장에서 봤던 그 영화를 내 집의 거실에서 다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절해고도의 수감자 두 명이
등장하는데, 그들 중 한 명(스티브 맥퀸)은 섬 주변의 치명적인 조수를
극복할 방안을 강구해서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는 반면에, 다른 한
명(더스틴 호프만)은 의식주가 보장된 섬에 남아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많은 이들이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며 감동을 받았을 터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주인공의 용기가 일종의
각성 효과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주어진 현실에 남아있기로
한다면 먹고 사는 것은 그런대로 보장이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죽을지도
모르는 난관에 몸을 내던져, 주어진 '현실'을 뛰어넘는 도약을 감행한다.
사실
나는 몸을 내던져 탈출을 감행하는 스티브 맥퀸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삶이란 안주인가, 모험인가? 나는 후자가 생성할 미지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래서
'모험'을 수용하기로 했다. 모험은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
나도 간혹 위험을 겪었다. 그러나 도저히, 결코, 비좁은 무인도에서
돼지나 치는 더스틴 호프만의 역할로는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한 번 거친 대양에 몸을 던진 이상, 나는 앞으로도 계속 거친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다.
오늘
전철 안에서 선천적인 듯 보이는 신체 장애를 가진 젊은이가 금전을
구걸하는 모습을 봤다. 나의 "거친 파도" 운운은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
4.
수행은 내게 매우 가치있는
것들을 선사해준다. 허나 기껏 나 자신의 내면을 추스리는 정도의 가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런 정도로야 어디 나의 수행에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을 만 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호언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세속적 추구를 경멸하는 이를 경멸한다는 작가에게 별 다른 반론을
펴지 못하겠다.
그런데 때때로 길벗님들이 찬사를 실어 소개해주는
'월든' 정도의 저작을 생산해낸 소로우 쯤 된다면, 김훈 작가에게 세속의
가치의 초월에 대해 한 마디 해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