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단상

9월 단상(斷想) (2009/9/27)

1.

불경기에는 간혹 길가에서 '돈 받아 드립니다' 라고 씌어있는 현수막을 보곤 한다. 그걸 보면 조폭같은 수금원이 떠오른다. 돈 뗀 인간은 그런 흉폭한 써비스에라도 의존하고픈 흉폭한 마음을 품게 되는 이치로 인해 그런 광고가 존재하는 것이렸다. 거금을 떼인 것은 열 받는 일이겠다. 그런데 그다지 액수가 많지도 않은 노임을 떼이는 것은 그못지 않게 흉폭한 분노를 유발시키는 일이다. 노임에는 아직 그 기억이 생생한, 최근에 흘린 자신의 피와 땀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지적이고도 세련된 수금의 역사'라는 글이라도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나는 노임을 체불당하고 그 회수(回收)를 거행해본 경험이 여러 차례 있다. 물론 그것이 조금도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번엔 여름방학 때 몸바쳐 일한 학원의 노임이 체불을 당하게 됐다. 여러 번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하지만 아직 완전히 적응이 됐다고 보기는 어렵겠다. 그래서 이번에도 열을 받기도 하며 사태에 인간적으로 반응했다. 내 인간됨의 수준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런 경험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다 배울 때까지 경험은 계속되는 법이니까.

2.

9시의 1교시 강의실로 향하는 바쁜 초가을 아침의 출근 길, 청명한 하늘 아래 보도를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을 굽어본다. 그 인간을 어떻게 아작을 낼까 궁리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여름에 진땀 빼며 지옥철로 출근해서 열심히 뛰어줬건만 그 노임을 안 내놓고 있다니. 당장 이번 달 내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건 그렇다 치고, 인간이 괘씸해서 혼줄을 내줘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구체적인 방안을 요모조모로 따져보고 있는 내가 보인다.

지하철 열차를 내려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플랫폼을 걷다가 재채기가 터져나왔다. 신종 플루일지도 모르니 주위 사람들이 공간을 터준다. 나는 만성 비염 때문에 기온 변화에 따라 재채기를 잘 한다. 가방에서 휴지 쪼가리를 끄집어내어 손에 묻은 타액도 닦고 이왕에 코도 한 번 팽 푼다. 그리고는 그 휴지에 씹던 껌까지 잘 포장해서 눈에 띄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쓰레기통을 지나치며 흘낏 보니 '신문 수거함'이라 씌어있다. 물론 거기에다 기타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거 치우는 사람이 공연히 더러운 내 휴지 쪼각까지 치우게 한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니 던져진 휴지. 그 통을 뒤져 다시 끄집어낼 수도 없고.

지하철역 밖으로 나와서 인도를 또 걷는다. 무심코 내 팔을 보니 오늘 새로 꺼내 입은 하얀 셔츠의 손목 부위에 요상한 물체가 묻어있다. 꼭 코딱지같이 생겼지만 아닌 것도 같다. 눈살을 찡그리며 손가락 끝으로 닦아내려 하니 그 누런 점액질이 하얀 셔츠에 스며든다. 코딱지가 아니다. 코딱지에는 그처럼 투과성 높은 색소가 들어있지 않다―적어도 내 몸에서 비롯된 그것들에 대한 관찰에 따르면. 그럼 대체 뭘까? 어쨌든 내 순결한 셔츠 칼라에 지저분한 똥색의 얼룩이 살짝 배었다.

그 순간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An instant karmic response! ― So to speak. 즉각적인 카르마의 반응. 어쩌면 나의 도 닦기의 수준이 한 단계 '레벨 업'한 게 아닐까?'

온갖 잡것들과 오만가지 가치의 잡탕인 이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중생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영적/도덕적 순수성이 요청되는 그러한 레벨에 드디어 내가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게 아닐까? 그깟 휴지 쪼가리 하나 버린 '죄'에 대해 즉각 대가를 치루게 되다니! 터무니없는 과대망상 내지는 에고폭발증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레벨 업'일 수도 있고.

만약에 후자가 맞을 경우, 나는 내 돈 안 내놓고 있는 그 인간에게 어떤 행위를 취해야 할까? 혼내줘야 할까? 아니면 내가 강의실에서 이따금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코비씨 말처럼, 나의 '패러다임' 을 전환해야 할까?

3.

혼자 밥먹을 때 꺼내 읽는 니체의 책에서 그제 이런 구절을 읽었다:

고귀한 인간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많이 듣고 보며 사유[한다]는 점에 있어서 미천한 인간과 구별된다―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고 고등 동물을 하등 동물과 구별하는 징표이다. 세계는 인간성을 향하여 드높이 뻗어 올라가는 자에게는 더욱더 충실한 것이 된다. 그에게는 더욱 더 많은 흥미의 낚시 바늘이 던져 있다. 그의 자극은 끊임없이 커지며, 쾌와 불쾌도 마찬가지로 커진다―보다 고귀한 인간은 항상 더욱 행복하게 되고 또한 동시에 더욱 불행하게도 된다. 그러나 그럴 적에 하나의 환상이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줄곧 따른다. 즉 그는 인생이라는 저 위대한 연극과 악극 앞에 관객이나 청객으로 앉아 있다고 생각한다―즉 그는 자기의 본성을 하나의 사색적 본성이라 이름 짓고, 그럴 적에 자기 자신이 역시 인생의 진정한 창작자이며 속창작자임을 간파한다.

- 니체, <즐거운 지혜>

어쩌면 나는 이제 고귀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친 놈 헛소리라 할 이도 있겠으나, 내게는 몇 가지 심증이 있다. 어쩌면 원래 고귀했는데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미천하게 살아왔던 건지도 모르고.

4.

지난 몇 달간 돈 버느라 바빠서 못봤던 벗들을 요즘에 줄줄이 만났다. 다들 열심히, 성실히 생활하는 이들이지만, 오직 나만이 제 일이 재미있다고 할뿐, 모두들 삶에 낙이 별로 없다고들 한다. 나는 내 일이 재미있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 개인적으로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까지 믿는다. 벗들과 술기운이라도 오르게 되면, "취업전쟁 시대 젊은이들의 메마른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어찌보면 이 사회에서 그 누구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까지 떠든다. 내가 맡은 과목 중에는 '교육행정'과 '방법론'도 있다. 둘 다 그 과목명만큼 테크니컬하고 차갑게 들어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둘 다 나름대로 학생들에게 정신의 울림을 주려는 의도하에 기획하여 이끌어가고 있다. 딱딱해보이는 행정이나 방법론도 우리의 인간됨과 분리되어 다루어질 때 '영혼없는 공무원' 이나 맹목적으로 생산성(productivity)만 좇는 기술자나 배출하게 되지 않겠는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고귀함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고귀한 일을 감히 하다보니 나도 내재해있던 스스로의 고귀함을 점점 더 드러낼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싶다. 그게 하나의 심증이다. 맡은 강의가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즈음 나는 언제나 수업 내용에 관해 생각하고 있고, 언제나 공부하고 있다. 글 쓸 시간을 못내는 점이 아쉽지만, 지금은 공부하고 가르치는 데 집중할 때이겠거니 믿는다.

5.

밀린 8월분 노임을 받았다. 나는 그를 혼내주지 않았다. 그의 사업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악수한 뒤 그와 작별했다. 그가 돈을 안줬더라면 그리 해줬을까? 만약에 이것이 게임의 새로운 레벨이라면, 나는 이 레벨을 클리어해나가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머지 '심증'들의 타당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의 성공에 대해서 자신만만하지는 않다. 나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딛을 것이다'는 장담을 할 수 있는 재목은 못 된다. 그래서 부처와 예수와 융과 캠벨과 달라이라마와 베리와, 또 그밖의 수많은 스승들을 모시며 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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