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스승

지혜의 선생 (2009/12/13)

1.

올해부터는 매 학기마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수가 수백 명을 헤아리게 됐다. 그 학생들의 대다수는 아니겠지만, 꽤 많은 학생들이 내가 던진 성찰의 단서에 긍정적으로 반응한다―물론, 성적 부여자의 권력에 대한 반응도 포함돼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는 상담을 요청하거나 메일을 보내오는 학생들의 수 이외에도, 성찰의 단서에 접하여 눈빛을 반짝이는 학생들로부터 전해져오는 느낌도 들 수 있다. 혹시 나는 젊은이들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선생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혜를 전하는 선생이라... 어쩌면 그것은 십대 때의 내 에고가 꿈꾸던 나의 모습이었을 게다. "내 에고"라 함은, 그때의 그런 소망의 감정은 '지혜를 전하는 선생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다'는 매우 표면적인 허영을 동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혜를 구하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식하고 지적으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그리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하리, 에고의 허영이건 영성의 추구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지혜를 구하고 나누는 데 내 존재를 바치며 살게 됐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일 테지. 에고는 콤플렉스(감정 덩어리)일런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도 더 크고 온전한 '나'의 소중한 일부분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 에고가 이를테면, 내가 권력을 쥐고 있어 보인다든가, 돈이 많아 보인다든가, 주먹이 세 보인다든가, 명성이 드높아 보인다든가, 쎅시해보인다든가 등의 여타 옵션을 선택하지 않고, '내가 유식해보이는 옵션'을 골랐다. 어쩌면, 보다 깊숙한 차원의 영성의 추구가 에고를 도구로 이용해먹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동기야 어찌됐든 간에 결과적으로 내가 지혜의 공부 쪽으로 지향하게 만들었으니까.

2.

나의 지인들 중에는 '정신병자' 또는 '광신도' 등의 애정이 담긴 표현으로 나를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같은 과도한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세상 일에 대해 나만의 강한 의견을 갖게 된 것 같다. 아마 과거에도 내가 그러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의식적으로는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표방하며 '영성'이니, '신'이니, '사랑'이니 하는 용어를 기피했던 것이 삼십 대까지의 내 모습이었다. 허나 지금은 세상에 대한 이성적인 설명 그 자체는 진짜 지혜가 아니라고 여기게 됐다. 인간이 이 세상을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시각이나 시도가 지혜라고 여기게 됐다. 그러한 지향성 때문인지 나는 지혜에서 냉정함이나 예리함 보다는 열정이나 포괄성을 좇는다.

3.

교회 다니는 이들은 신을 영접했을 때 은사를 받는다고들 한다―'은사'란 한 개인의 일종의 주특기라고나 할까. 수행의 길에 들어선 초기에 내가 왜 더 이상 성당에 안 다니는지에 관한 설명을 들은 한 벗은 내가 지혜의 은사를 받았나보다고 말해줬다. 기성 종교를 떠난 나의 결정이 지혜에 터하고 있다는 벗의 평가는 나의 에고를 우쭐하게 해줬다. 수행 초기에 내가 가장 경계했던 것은 성자 콤플렉스였었다. 그 콤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지혜를 구함에 있어 신의 무한한 도움을 받고 있다고 믿는데, 이것을 나르시시즘의 발동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4.

얼마 전 전철 안에서 재미있는 여인네를 봤다. (맨날 전찰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다보면 인간군상의 흥미로운 광경을 종종 접하게 되는데, 나는 이런 점에서 늘 안락한 고급 승용차를 타고 음악 감상하며 다니는 부유한 이들이 삶의 다양한 편린과 직접 대면하게 되는 서민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돼있고, 따라서 부유한 이들의 인간 이해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 편의 위주적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한산한 전동차에 오른, 채 서른도 안돼보이고 안경을 쓴 젊은 여인은 기차가 출발하자 낭랑한 음성으로 자신의 사연을 차내의 승객들에게 풀어놓는 것이었다. 나는 외판원 또는 전도 환자일 것이라 여겼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영 다른 케이스였다.

그녀는 부산에서 막 올라왔다는데 말씨는 전형적인 서울 말씨였고, 자신의 IQ가 150이 넘어서 자신의 그 우수한 두뇌를 나라를 위하는 일에 쓰고 싶은데 그것을 막는 세력들이 있어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자 전철에 오르게 됐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막는 세력은 다름아닌 '이명박이'였고, '이명박이'는 자신을 청와대로 강제 납치하여 동침을 '자꾸' 강요하는데, 문제는 그녀의 약혼녀가 가수 비라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와 '조폭' 집단들과의 은밀한 거래 내역을 다 알고 있었지만 비극적인 운명으로 비와 약혼했는데, '이명박이'가 비를 사위로 삼고 자신의 몸을 취하고자 획책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이 그 유명한 '바다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대목은 전혀 스토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그녀가 '바다 이야기'를 사행성 오락기가 아닌 어떤 드라마 같은 것으로 오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여타 전도 환자 등과 비교해볼 때 음성은 낭랑하되 너무 시끄럽지도 않고 말씨도 또박또박하며 조리있게(?) 자신의 공상의 세계를 펼치는 그녀의 이야기 앞에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고 경청하고 있는 듯 싶었다. 실은 나도 재미있게 듣고 있었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계속 듣지 못하고 아쉽게도 도중에 하차해야 했다.

그녀는 과대망상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정신분열증 환자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스토리 구성 능력을 볼 때 작가 성향을 갖고 있는 것도 같았다. 흥미로운 케이스인지라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풀어놓았다. 나는 그녀의 사연을 약 10분 여 경청했는데, 그녀의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설명 중에 실제로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사고한 내용은 전무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해석하는 모든 '콘텐츠'는 기실 완전히 허구에 불과했고, 그 허구의 자료는 매스컴에 늘 가장 많이 등장하는 뉴스나 드라마 등에서 취했던 것이다―대통령, 연예인, 조픅 운운. 그녀는 물론 극단적인 케이스이지만, 나는 학생들에게 우리도 그러한 면을 지니고 있지 않은지 질문했다. 즉, 우리도 자기 자신을 규정하고, 자신의 욕구와 의지와 선택을 해석함에 있어서 스스로 세상과 부딛치고 경험하여 형성한 자신만의 사고, 성찰은 별로 갖고 있지 못한 채, 대체로 매스컴에 등장하는 별반 의미없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과 풍문과 통념을 자료 삼아 자신과 세상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질문했다. 실은 우리도 그 정신이상 환자처럼 세상의 통념('대세')과 유행('트렌드')의 흐름에 편승한 채 살아가다보니, 자기 힘으로 사고하고, 세상을 해석하고,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박약한 현대인이 돼버린 것은 아닐까?

몇 달 전에 대유행했던 노래의 가사를 다섯 살먹은 조카 애가 따라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 어른들은 요즘 그런 노래의 지나친 표피 지향성에 눈쌀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이 얼마나 절묘한 노랫말인가! 자신이 남들의 눈에 그렇게 보이기를 간구하는 바, 즉 페르조나 숭배의 극한을 보여주는 시 한 수라 할 만 하다. 젊은 아이들도 이 사회의 어른들 못지 않게 밖으로, 밖으로만 눈을 열고 자신의 껍데기에만 온 신경을 다 쏟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5.

사람에게는 '껍데기' 포함하여 바깥도 중요하지만 안도 중요하다는 내 의견을 학생들에게 풀어놓았다. 안과 밖의 양쪽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뤄야 온전한 인격으로 잘 살 수가 있다는 동서고금 성현들의 결론은 거부할 수 없는 지혜이다.

나는 그와 같은 지혜를 찾고 전하는 자가 되고픈 에고의 욕심을 갖고 있었다. 물론, 지혜롭지 못하니 지혜로운 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혜를 구하는 내 욕심의 표피성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 이후로는 그 천박함에 대한 부끄러움에 의해 덜 시달림 당하게 됐고(참아줄 만 한 존재의 가벼움), 그래서 계속 삶속에서 살아있는 지혜를 찾기 위해 공부도 하고 성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건진 지혜 조각들을 학생들에게 전하려 했다. 그렇게 전해진 지혜에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실은 내가 학생들에게 지혜를 준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함께 지혜를 구하고 있었던 게다. 내가 지혜를 찾아 나서고 이따금씩은 지혜를 건질 수도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부지불식 간에 지혜를 찾고 있던 젊은이들의 마음에 반응하여 그러한 것이었다. 그렇게 건진 지혜를 학생들에게 전하는 기능을 내가 임시로 담당하기는 했지만, 지혜를 찾도록 나를 부추기고 등떠민 것은 학생들이었다.

나아가 나는 학생들에게 지혜를 전함으로써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어준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과정을 통해 내가 구원을 받았다. 현상의 차원에서는 마치 내가 지혜의 선생이고 지혜를 전해 학생을 구원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본질적 차원에서는 나와 학생들 모두가 함께 지혜를 구하고 있었고, 그 과정을 통하여 오히려 선생 역을 맡은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이 진실을 일본의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에 대한 영상을 학생들과 함께 시청하며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스승이라는 영성의 진리를 새삼 떠올린다. 현상에 함몰돼, 현실에 파묻혀 살다보면 영적인 차원의 진리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수행자가 영적인 스승에 귀의할 때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스승에게 내맡기고 큰 절을 하는데, 이는 스승이라는 개체의 에고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승과 함께 동반자로서 일구어 갈 영적 성장의 길 전체를 관장하는 자비로운 신, 스승의 배후에 임하는 그 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예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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