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강원도 (2009/5/10)

지난 1월 말 이후로는 너무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없어서 맘잡고 가족과 주말에 놀러가본 적이 없었다. 평소 뻔질나게 여행 데리고 다니던 애비가 주말마다 일에 매달려 있음에도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리지 않은 것은, 지난 겨울에 호주 여행을 장기간 다녀왔다는 사실을 애비로부터 간헐적으로 상기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전국 방방곡곡 잘 싸돌아다니던 여행 팀인 우리 가족이 서너 달 넘게 방콕 신세로 남아있기는 어려운 법, 석탄일 낀 주말에 차에 짐을 싣고 강원도로 여행을 떠났다.

토요일을 충청북도에서 보낸 뒤에 차가 밀리는 영동고속도로로 기어올라와, 저녁 무렵에는 홍천 쪽으로 향했다. 홍천 읍에서 동쪽 태백산맥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아로마 허브 동산'이라는 곳을 숙박지로 예약해뒀기 때문이다. 문화관광부에 의해 '굿 스테이' 숙박지로 선정된 곳이어서 깔끔한 숙소를 저렴한 비용에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숙소 전역이 허브 농장이라 하여 딸내미들이 좋아하리라 예상했는데, 예상했던 것 보다도 더 나은 곳이었다. 숙소도, 식당도, 허브 꽃밭도 훌륭했고, 농장에서 일하는 이들 전부가 아주 친절했다. 그분들과 지나가는 객으로서 농장 일, 식물들, 또는 주변 지리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는데, 내 추측으로는 대가족 3대가 모여 살며 농장과 숙소를 꾸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그 속 사정에 대해서까지 질문해보지는 않았다. 육십대 이상의 남성 두 분은 젊은 객에게 친절하고도 자상했고 식물 가꾸는 일에 상당한 열의와 정성을 들이는 것이 보기에 좋았으며, 장년의 남성들과 아낙들도 후덕하고 근면해보였다. 그들을 관찰하며 나라면 집안 어른들과 처자식을 이끌고 이런 곳에 와서 공동생활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워낙 도시에 길들여진 메마른 성정의 인간이어서 그리 잘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자연친화적 생활에 대한 나의 동경은 꽤 집요한 편이다.

이튿날 '허브 동산'을 떠나 산맥을 넘어 양양으로 빠져나오는 56번 국도(춘천-서석)를 탔는데, 이번이 초행인 이 길은 평소에 늘 다니던 인제-한계령이나 미시령 쪽 길 보다도 빼어난 경치를 숨기고 있었다. 내린천을 거슬러서 차로 산을 넘어가며 파릇파릇한 신록의 숲에 내 눈이 폭 젖어버렸다. 잠시 낙산 해변에서 바닷바람을 쐬고 난 뒤, 선배 한 분이 추천해준 대로 양양의 남대천을 따라 어성전 계곡 편으로 차를 몰아 갔는데, 그곳 또한 빼어난 산수를 간직하고 있어 운전하는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길 한 구비를 돌 때마다 펼쳐지는 전경 앞에서 "우와, 여기서 살면 좋겠다!"는 혼잣말을 몇 번이나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이날은 두 해 전에 아이들과 하루 묵었던 이래로 아이들이 또 한 번 가자고 줄기차게 졸라온 '풀하우스'라는 펜션에 여장을 풀었다. 점심 때 우리와 합류한 손 아래 처남 가족과 함께 계곡의 물소리 들으며 바베큐 파티도 벌이고, 처남과는 거나하게 술도 마셨다. 내 딸들은 아기자기하게 지어놓은 펜션의 방 자체를 좋아하고, 나는 외딴 산속의 조용한 계곡 옆에 자리잡은 그 입지를 좋아하여 이곳을 2년 만에 또 오게 됐다. 이곳에 와서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라는 옛 시조가 떠올랐는데, 그건 지난 번에 우리를 맞았던 원래의 주인장이 전문 호텔리어 출신으로 인상깊은 사람이었건만 그는 펜션에서 손을 뗐고, 다른 주인장이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새 주인장은 서비스업에 경험이 일천한 분이어서 투숙객들과 이런 저런 면에서 삐걱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붙임성 있는 처남이 술과 고기를 권하고 대신에 주인장의 김치도 받아먹게 되며, 우리와는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환갑이 다 된 부부가 평생 하던 일을 접고 익숙지 않은 펜션 운영을 하려니 애로사항이 꽤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간 전국에 다녀본 펜션이 20여 곳에 이르는(것으로 기억되는) 나는 여관이나 민박과는 또 다른 '펜션' 만의 특성을 조금 알고 있기에 주인장께 소주를 따라드리며 나름의 조언을 드리기는 했지만, 예전의 프로페셔널한 주인장의 기능을 되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참으로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생활하지만, 펜션 주인장 부부의 삶은 도시인들의 그것 못지 않게 고단해 보였다.

이 펜션의 2층 방에서 하루를 묵는 내내 가장 나를 즐겁게 해준 것은 바베큐도 술도 아니었고, 창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신록이었다. 중학생인 시시가 앉아있는 저 멋진 의자의 옆과 뒤의 창문을 통해 초록 이파리의 싱그러운 바람이 그치지 않고 집안으로 불어들어왔다. 베란다 바로 아래 켠에 흐르는 계곡 물줄기 소리도 나의 마음을 짙푸르게 휘감아 돌았다. 이런 안락한 시설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접하며 자연과의 합일을 느낀다고 표현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춘기 때 처음으로 자연과의 합일감의 희열에 젖었을 때에 나는 거의 노숙에 가까운 형태로 야영 중이었었기에. 어찌됐든, 신록에 감싸여 있는 것이 내게는 더 바랄 것 없는 행복 그 자체였다. 나의 소시적 환경에 자연이 결핍됐었기 때문에 내가 이토록 자연을 갈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아동기에 몇 차례 접했던 자연의 추억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하는 것일까? 펜션 주인은 힘들게 업소 운영하며 자연 속에서 생계를 꾸려가겠지만 나는 자연을 낭만적으로만 대할 따름이겠다. 어찌됐든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벗어나 강원도 산골처럼 조용한 곳에 정착하여 살고픈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아무리 낭만적 갈구가 있으면 뭣하겠는가, 막상 이런 산골에 내려와 앉아 있으면 경제생활이 해결이 안되는 것을. 내가 비록 대체로 검약하고 재물욕도 적은 편이지만, 처자식 부양에 대한 책무를 져버릴 수야 없는 일. 그저 꿈이나 한 번 꿔보고, 아쉬운 발길을 돌려 서울 쪽으로 향한다.

자문해본다. 나는 왜 도시가 싫은가? 나는 인간이 군집성이 약한 생물이라는 루소의 믿음에 공감한다. 비좁은 지역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뜰 앞이 탁 트인 널찍한 공간에서 텃밭에다 채소도 심고 꽃도 심고 나무도 가꾸며 시원 시원하게 사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삶을 돌아볼 때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똘똘 뭉쳐서, 또는 한데 엉겨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 또한 분명하다. 게다가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매우 중히 여기는 인간이기도 하다―강의를 안 나가면 나는 일주일 내내 아무도 오지 않는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아마도 도시 환경에 대한 비호감과 전원의 고적한 삶에 대한 호감 양자가 작용하여 강원도에서 귀가하는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 같다.

마침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나처럼 연휴를 마친 행락객들의 차들로 인해 밤 늦은 시각까지 꽉 막혀있었다. '너와 나'의 차 사이에 단 몇십 센티 공간적 여유 주기를 인색해 하는 도시의 길과 주차장에서 나는 강원도의 골짜기와 산자락을 어루만지던 시원스러운 바람을 그리워 했다. 나는 그저 공간적 일탈이나 탈출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영혼의 비상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비록 도시가 나로 하여금 소명을 이행할 제반 장치와 기회를 제공하지만, 나는 언제까지고 서울과 같은 거대도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못할 듯 하다. 그곳에서 태어나서 자랐음에도. 사람이 그 안에 하늘의 진리를 품고 있는 존재임을 믿지만, 그 사람들이 모여서 악마구리를 창조해내기도 하는 법, 바로 도시가 전원에 비해서 후자의 경향을 부추길 가능성을 많이 품고 있는 곳이리라.

물론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내 정신을 담금질하여 수행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 도시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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